끄집어내자 숨겨진 어둠을!

오 그렇게, 오 그렇게, 널 찾을 거야

by 박찰리

슬픔을 사서 느낀다. 내가 정의하는 우울과는 확실히 다른, 좀 더 오락에 가까운 기분을. 풀 먹은 천처럼 축 처지는 느낌을 즐긴다. 왜인지 강해진 중력을 마음껏 만끽한다. 축축하고 짠맛 나는 그 슬픔은 불타는 한가운데의 물수건이 되어주리라. 이르다고도 늦었다고도 할 수 있는, 해뜨기 전의 새벽이 되면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엉엉 오열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십몇 년 인생 역사상 이례적인 증상.(이라고 나는 생각하며 소속감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즐겼다.) 문뜩 이게 정신병인가 싶어 습관처럼 반복하고 있는 이 새벽 중의 오열을 심리 상담사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정신병이 도지는 건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곤란해하던 선생님.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매번 똑같은 해결책을 반복 추천하는 선생님.

나에게 슬픔을 주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영웅본색」이나 「아비정전」 같은 영화(단골 소재로는 연인 간 이별이나 죽음의 상황 등이 있다.), 귀여니의 『내 남자친구에게』나 가그린의 『온새미로』 ‘깔‘의 그때 그 시절 인터넷 소설, 박혜경의 「주문을 걸어」, 장국영의 「분향미래일자」 비슷한 슬픈 음악, 그리고 지금은 전성기를 잃어버린, 빛났던 모든 것들. 박혜경의 「주문을 걸어」를 들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건 결코 슬픈 노래가 아니다. 신나는 멜로디에 미래를 기약하는 희망찬 가사. 그렇지만 나는 노래를 처음 듣고는 괜히 울먹였더랬지. 신나는 멜로디와 단정한 박자 사이에 숨겨진 구슬픔을 분명 느꼈더랬지. 나나나 나나나 나 나나나나나… 음악을 반복 재생하고, 영화를 재탕하면, 사골 국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사골 국물을 사골 국물이라고 하기도 뭐 할 정도로 슬픔을 우려먹다 보면, 눈시울이 진정되고, 눈물샘이 마르고, 이 감각에 무뎌져 버리는데. 나는 무뎌짐을 깨닫는 순간, ‘슬픔’이 아닌 ‘우울’을 느끼기에, 다시 강구하는 것이다. 슬픈 요소들을 억지로 발견하려 온 힘껏 몸부림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이런 현상을 슬픔 중독 또는 카타르시스 중독이라고 불러왔다.


오늘에서야 나의 모든 기행들과 비슷한 현상을 찾은 것 같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발견했고, 무려 현상명이 존재하는. ‘찾았다’도 아닌 ‘찾은 것 같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나의 증상과 이 정해진 현상의 일치율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증상의 이름은 바로 샤덴 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는 의미인데, 인터넷에서는 샤덴 프로이데와 어느 정도 통하는 선에 있는 한국 단어로 쌤통을 제시했다. 내가 느끼고 즐기는 이 기분은 쌤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샤덴 프로이데는 내 심리를 완벽히 관통하는 단어가 아니고, 따라서 두 현상의 연관성에 의문을 가진 것이다. 정의로만 샤덴 프로이데를 이해했을 때는 그간 느껴왔던 기분과 소외감을 이해받는 것 같아 기뻤는데, 다시 내가 ‘평균의 감정’과 단절되어 버린 듯했다.


내가 느끼는 사랑은 전부 계획된 것일까? 나의 모든 사랑은 종내에, 결핍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부터 또는, 슬픔을 억지로 발견하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불건전하고 멋모를 욕망으로 정의될까? 나는 이처럼 주기적으로 내 사랑에 대한 걱정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결국 해답은 내리지 못한 채로, 단순한 내 심장 박동에, 온몸을, 쥐똥 만한 전재산을, 그리고 감정을 모두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래, 한낱 인간인 내가 무슨 수로 뭐 어쩌구 저쩌는 체내 화학반응을 이기겠어, 합리화하며. 사골국처럼 우려먹고 부려먹다 보면 슬픔 권태기는 결국에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방인이다. 새로운 슬픔을 찾아 떠나는, 그리고 다시 떠나는.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