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과 멋 | Bread,Brot,Pain 빵빵빵 2

빵 빵 빵 2

by Ggockdo



독일에 도착한 열 다섯 날 째에, 나는 일기에 밥과 빵을 비교하며 이렇게 썼다.


... 움푹한 밥그릇에 가득 들어찬 뜨끈뜨끈한 밥 알갱이들은 마치 아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네 같습니다. 얼마간의 열기를 가지고 서로 엉겨 붙어 어떻게든 따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 무리들. 어떻게든 움푹한 밥그릇 하나에 들어가 있으려고 세로로든 가로로든, 물구나무를 서든, 달라붙는 그 모양새가 정겨운 것은 아마도 그래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빵처럼 하나의 반죽으로 뭉개지지 않고 하나하나 알알이로 살려고 그 형태를 악착같이 유지하는 것도 또 우리같습니다. 입안에서 침에 전분이 녹으면 알알이 흩어져서 하나의 객체로 돌아가는 것도 또 우리같습니다.


그 뭉침이, 한 그릇에 아둥거리며 들어가는 것이 사실 맘에 안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잡곡밥이 아니라 백미만 가득한 흰쌀밥 한 그릇에서 똑같은 흰색 쌀알갱이로 조그마한 그릇에 같이 껴붙어 살아보겠다고 했던 날들의 비참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그릇에 담겨 있지만 저만 다른 잡곡입니다. 흰쌀밥 가운데 놓인 오롯한 한 알의 완두콩. 작고 움츠려 들듯 동그랗게 말려 들어간 연한 초록빛. 처음에는 그들의 흰쌀밥들 가운데 혼자 콩이라는 사실에 약간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은 완두콩입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이 한 그릇 안에 똑같은 하얀 쌀밥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면 거기에는 스페인산 옥수수나, 예멘산 검은콩도 있고 일본산 조나 한국산 현미도 있기 마련입니다.


... 저는 여기서 빵이든 밥이든 그 빵과 밥 사이에 안친 한 알의 작은 완두콩입니다. 갓 삶겨 뜨끈뜨끈하고 연한 초록빛이 하얀 쌀알갱이들 위로는 초록빛을 반사하고 빵 위에서는 동그란 그림자를 내는 잡곡입니다. 이 밥공기는 갓 지은 것일지, 식어가는 것일지 아직 모릅니다. 또 여기에 내 자리가 확실할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밥공기 위에 얹힌 순간, 이미 저는 여기 식대로 움푹하지 않고 넓어 굴러다닐 자리가 조금은 더 충분한 각종 밥알들 위에 굴러다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쉬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 15일째 날의 일기 중 -



밥솥이 없었다. 빵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보름동안 쌀은 한 톨도 먹지 못했다. 보름 만에 먹은 밥은 한인교회에서 배급해 주는 점심식사였다. 밥은 푸석하고 굼뜬 맛이 났다. 밥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반가워 웃으며 먹었다. 한인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면, 남는 밥과 반찬을 얻어갈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밥을 얻어간 적이 없었다. 함께 유학 온 젊은 부부가 셋이나 있었기 때문에 내 몫의 밥과 반찬은 늘 그들에게 양보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일기에 쓴 것처럼, 완두콩으로 살아야 한다면 흰쌀밥 그릇보다는 빵이 더 나았다. 빵의 나라에서는 빵의 법칙으로, 주식主食의 국적은 금방 내 위장을 길들였다.


나는 밥 짓는 냄새같이 올라오는 새벽 빵집의 냄새를 좋아했다. 독일에서는 베커(제빵사)Bäcker를 베커(알람)Wecker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아침을 준비하고 영업을 준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겨울, 이른 새벽 산책을 나설 때 어둑한 거리의 방범이 되어주는 것도 빵집이었다. 코 끝이 시린 검은 추위에 가느다란 불빛과 흰 김이 폴폴 새어 나오는 곳은 죄다 빵집이다. 유달리 해가 드문 겨울밤, 불빛마저 서늘해도 새벽거리를 함부로 거닐었던 것은 오직 빵집 덕분이었다. 빵 반죽 부푸는 냄새가 환기구를 통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겨울이면 따뜻하고 구수한 반죽 냄새는 흰 김으로 과감히 뿜어져 나왔다. 길바닥마다 서리가 얼어붙어 있어도 빵집 앞은 물방울이 잔뜩 맺히고 훈훈했다.


나의 산책로에 빵집이 6개나 있었다. 가장 늦게 여는 빵집이 가장 집과 가까웠다. 언 발을 동동대며 라인강 강변을 따라 시리게 걷다 집으로 돌아가려 뒤돌면 형광 조끼를 입은 환경미화원이나 마트의 신선식품을 내리는 트럭운전수가 곳곳에 보였다. 그들은 가장 처음에 구워진 따뜻한 빵 하나와 커피를 들고 빵집 앞에 서서 훌쩍거렸다. 뜨거운 커피와 빵brötchen의 온기는 언 코를 녹여 꼭 코끝에 물이 고이게 했다. 코가 큰 그들의 코끝에 대롱거리는 따뜻한 숨은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쳐 인사하게 만드는 귀여움이었다. 아침인사를 하기에도 일러서, 우리는 그저 할로, Hallo, 라고 작게 웅얼거리고 고개를 까딱였다. 이른 새벽 빵집 앞에서 나누는 인사는 미등처럼 깜빡이고, 맛있었다. 나는 덩치 큰 그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가서 그날, 첫 빵으로 나온 따뜻한 호박씨빵과 커피를 사서 선 채로 먹었다.

그것은 식사가 아니었다. 짭조름한 작은 빵 하나와 커피는 간식이나 식사가 아니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온도였다. 영양학적이나 정신적인 효과를 바라고 먹는 것도 아니었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선 채로 우물거리는 작은 빵은, 일종의 기지개 같은 것이었다. 어둑한 하루를 후두려 쳐 깨우는 어머니의 밥 짓는 냄새 같은 것이었고 잠을 깨우는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때만큼은 집에서 식탁에 둘러앉아 먹어야 하는 쌀밥의 국적보다 손가락 두 개로 들고 먹는 빵의 국적이 훨씬 유리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알았고 몇 시쯤에 어느 빵집 앞에 있는지도 알았지만 이름은 몰랐다.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달리 아시아인이 없던 동네에서 새벽마다 덜 깬 얼굴로 작은 빵을 우물거리는 동양 여자 하나는 금방 눈치챌 수 있는 완두콩이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늦게 산책하러 나가도 빵집 앞에서 빈 커피컵을 들고 서 있던 '빵의 동료'들은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먹는 호박씨빵이 한 개씩은 꼭 남아 있었던 것이나 눈인사라도 하고 나서야 흩어지던 형광조끼들은, 어둑한 위장에 어린 고소한 이정표였다. 오늘 또 하루를 살아내라는.



Les pains de Picasso, Robert Doisneau, 1952



사진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도시였다. 빵집 세 개를 거쳐 큰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곳에 카메라 대여점과 인화지 전문점이 있었다. 라이카 Leica가 기종별로 진열되어 있고 철조망 셔터가 유리문 앞에 내려진 카메라 대여점 앞에는 유명한 사진들이 종종 걸려 있다 팔리곤 했다. 그중 하나는 로버트 드와노Robert Doisneau의 피카소Picasso 사진이었다. 줄무늬 옷을 입은 피카소와 식탁에 놓인 빵 손가락은 그리 식욕을 돋우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포만감을 주었다. 나는 꼭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길을 건넜다.

피카소의 손가락을 먹고 싶었다. 무기력한 날에는 피카소의 손가락으로 놓인 저 빵을 잘근잘근 씹어 넘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피카소의 손가락 빵은 어디서 구해요?" 캄스Kamps(독일의 가장 흔한 빵집 프렌차이즈)의 직원에게 물었다. 피카소의 사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빵집이었다. "손가락?" "왜, 저 쪽 골목 끝에 있는 카메라 대여점 있잖아요. 거기에 걸린 피카소 사진에 나오는 빵 말이에요." 제빵사는 퉁명스럽게 내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새벽 빵을 사 먹는 지역 빵집에 다시 한번 물었다. “피카소 손가락 빵 알아요?" "피카소?" 카푸치노를 시키면 작은 버터케이크 조각을 몰래 주는 아주머니는 되물었다. 나는 벌써 속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되물은 것과 '피카소?'를 되물은 것은 아무래도 큰 차이다. 피카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아주머니는 '피카소 사진에 있는 손가락 같은 빵'을 직접 보고 오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며칠 뒤, 나에게 베크만Weckman 빵 중에 제일 못나 보이는 것을 담아 주었다. 밍숭밍숭하게 사람이 되다 만 베크만빵(곰방대가 붙은 사람모양빵.)은 일을 많이 한 뭉뚝한 손 같기도 했다. "피카소도 사람이니까." 아주머니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베크만은 딱딱하고 밀도 높은 독일빵 중 부드럽고 밍숭 한 맛을 가진 유별난 빵이다. 나는 그런 밍숭한 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이 피카소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하고 뜯어먹었다. 피카소도 사람이니까, 사람모양 빵을 뜯어먹었다. 그의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과 재능에 대한 확신이 내게도 머물기를 바라며 먹었다.

손가락만한 라우겐슈탕에laugenstange도 가끔 사 먹었다. 어쩌면 짭잘한 것이 피카소의 손가락빵일지도 모르겠다. 길쭉한 프레첼pretzel인가, 아니면 그냥 흰 빵인가. 손가락 빵이라고 추측되는 빵을 섭렵했다. 빵들은 모두 슴슴하고 담백했다.


피카소의 저 사진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손가락 모양으로 정렬해 놓은 빵과 그의 심드렁한 표정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빵,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빵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가져야 할 열 손가락의 빵을 겸허히 내미는 것 같아서, 아직도 손가락 빵의 행방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소금빵이나 달이 되다만 크루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사진과는 다른 모양이지만 그저 조금 작은 바게트일 수도 있다. 무슨 빵이든지 피카소의 손가락은 식탁에 일용할 양식으로 놓여 있다.


피카소가 예술을 향해 뻗친 빵을 우물거리며, 슴슴해서 유별난 베크만 빵처럼 사람같은 슴슴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달콤하거나 유별난 재료, 특별한 테크닉이 들어가 있지 않은 빵이어야 누구에게라도, 어떤 이야기라도 잘 소화될 테니.


하지만, 정말 피카소의 손가락은 무슨 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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