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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LifeBGM 23화

LifeBGM |걸음을 돋구어, 웃음을 돋우어, 가자.

Triosence - Lale Minna

by Ggoc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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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다이어리와 달력, 일기장이 모두 비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문득 수첩을 펼쳤다 날일로 2주, 스케쥴러 2장, 14장의 빈 일기장 페이지(실은 일기는 좀 더 비워져 있습니다.)를 보고 조금 슬퍼했습니다.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게 어쩌다 보니 흘러간 구간, 너무 지독했었다는 것만 흐릿한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압니다. 그래도 한 걸음 제대로 내딛지도 못한 보름이 아까운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 2주를 패배했다, 는 분명한 무망감이 하얗게 남아있습니다. 그 지리멸렬한 시간을 몸서리치며 회고하면 그저 형벌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붓는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었다 깨고 난 뒤, 축축하고 더운 기후위기 뉴스를 들었습니다. 내 감정도 기후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2주, 그보다 실은 더 오래전부터 위기일발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어쩌지 못하고 빈칸으로 남겨 둔 채,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고 황망했습니다.

비로소 오늘의 나는, 납작해진 치약튜브입니다. 힘을 주어 박박 긁어, 겨우, 에걔, 아무리 그래도 고만큼인가 싶게 쥐어 짜낼 만큼 짜낸 고갈품입니다. 새 치약을 뜯는다고 해서, 그 치약의 본질과 이름은 바뀌지 않을텐데, 다 비어버린 빈 치약튜브를 쥐고 욕실 거울을 보면, 거기에 납작해진 얼굴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정이 통보되었습니다. 해야 하는 일들, 주제들이 거대하게 내 숨통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징검다리 삼아 건널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비워진 2주간의 공백을 보면 아무래도 징검다리는 글러먹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바지를 걷어올리겠노라며 짐들, 말들, 주제들 앞에 앉아서 밑단 하나 접어 올리지 못하고 앉아 있었나 봅니다. 차마 울지도 못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나 자신의 한심한 작태를 노여워하면서.


시작을 재촉하는 음악을 들어야겠어. 또는 징검다리를 리드미컬하게 건너가기 위한 구름판 음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우산을 한참 털었습니다. 검은 우산은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낡고 까맣고 빈 것이고 마치 2주간의 새 하얗게 남겨진 노트를 먹칠해 꿀꺽 삼켜 먹으려는 것 같습니다. 나는 순순히 검은 우산을 들고 하루 종일 쏘다니며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이러저러한 음악을 전전했습니다.


Triosence - Lale Minna


어떤 음색과 사운드가 몸을 일으켜줄 수 있을까. 쿠바와 브라질의 삼바, 라틴 음악이나 템포가 무작정 빠른 음악, 스윙, 펑크, 클래식 왈츠, 심지어 신년 음악회까지 찾아보아도 시작하는 음악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장엄한 시작이나 거대한 결심의 웅장한 마음으로 일어설 수 없는 납작한 튜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개운하고 상쾌한 아침 양치질의 느낌으로 간지럽혀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트리오센스는 독일 트리오 중에 가장 밝고 경쾌한 재즈 트리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늘 명료하고 감정 드러내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그들의 연주를 자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해 새로 발매된 앨범은 조금 달랐습니다. NRW지역의 1700년대 그림을 연상케 하는 표지는 숲 속의 강에서 아침 수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한적한 뒷모습이 보입니다. 순전히 표지에 이끌려서 다시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토비아스의 맑은 칼림바로 시작하는 청명한 사운드에서 아침 햇살을 느낍니다. 분명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긴 시차를 건너 계곡에서 아침을 보내오는 서신을 받은 것처럼 달갑고 환합니다. 베른 하르트 슐러의 피아노는 텁텁한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려는 듯이 연주되고 사박사박한 스네어와 베이스 소리가 새로 개봉한 치약을 잔뜩 올린 칫솔질로 마음에 들어옵니다.


2주간 유보한 내 속에 잔뜩 낀 이끼가 개운하게 씻겨나갑니다. 휴가를 가야만 했었던, 가지 못했던 지난 2주 동안 증발해 버린 내 의식과 감정과 말소리들이 모두 뭍으로 올라옵니다. 빈 노트를 모조리 건너뛰고 오늘자 칸에 적었습니다. Lale Minna. 에스토니아어로 '가자'는 말입니다.

나는 가끔씩 나도 모르게 '자, 가자.'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입니다. 이제 그만 지치고, 딴청 그만하고 가자,라고 작게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트리오센스의 저 이름이 진짜 에스토니아어로 '가자'를 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텅 빈 내 기록들과 사라진 의욕을 쥐어짜고 있었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차마 걷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로 읽기로 합니다.


가자, 고 읽지 않기엔, 칼림바 튕기는 소리와 피아노의 선율이 새로운 탐험을 떠나는 아이의 마음을 너무 많이 담고 있습니다. 해맑게 웃는 트리오센스의 세 얼굴들이 동그랗고 참 예쁜 모양으로 웃습니다. 웃음 돋우고 걸음을 돋구어 가자, 연주합니다. 너무 본격적으로 내달리는 사운드가 아니라 여름의 호수에 유순하게 흘러가는 아침의 개운함으로 조금씩 오금을 밀어냅니다. 이런 종류의 응원을, 달리 어떤 선율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맑게 끝나는 칼림바 선율 끝에서 발바닥을 받쳐주는 넓적한 반석이 느껴집니다. 비가 몽창 쏟아져내려도 걸어보라고 말합니다. 새 치약으로 이를 닦아야겠습니다. 백지가 된 2주 동안의 스케쥴러에 한 칸에 한 번씩 쓰고 다음장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가자, Lale Minna, 청명한 마음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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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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