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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LifeBGM 26화

LifeBGM | 그리움을 그리워함

Tears for Esbjörn - September Second

by Ggockdo


그리움은 예사 감정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한숨과 한숨 사이의 틈새에 사는 감정이며, 달달 볶아대는 삶의 뜨거운 고철 무대에서 잠시 내려올 때 핑 도는 어지러움 같은 것입니다. 잠깐 아득해지는 정신에 깃드는 것입니다. 어떤 삶에게 그리움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서 승부수를 띄운 뱃머리 앞에서 끊임없이 수거되어 버려져야 할 감정입니다.

그러나 버린 그리움은 반드시 나를 다시 쫓아옵니다. 지독한 스토커처럼 그림자 밑에 붙어 몰래 따라오다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면 불시에 나를 덮쳐 옵니다. 그리움은 잊히는 것을 고까워하고 가끔 표독스럽게 굴며 기어코 마음의 표피를 긁어갑니다. 그런 속절없는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점점 시간을 많이 채운 인생일수록 그리움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마음처럼 되던가요, 사는 게 그렇게 된다면 그리움이 존재하지 못하겠지요. 마음처럼 되지 않은 무수한 일들이 흩어져 그리움의 먹이가 되는 법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그리움의 먹이가 됩니다. 나는 그것이 진절머리가 날만큼 지겨워서 어느 때에는 그리움을 가득 담은 가방을 벼랑 아래로 굴려 버리거나 한강이나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가방은 늘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아무리 버려도, 아무리 멀리 떨어트려놓아도...


압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그리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그리움을 먹고 누군가의 그리움의 먹이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 광경을 사람이나 생명에 비유하여 그려낸다면 고야의 사투르누스(『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사투르누스』1820-23) 그림만큼 끔찍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서로의 입에 머리를 쳐 넣고, 손가락과 발가락 하나를 씹어먹으며 사는 우리의 지독한 그리움들.

그들의 생태계를 파헤쳐 고발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아무도,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생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를 그리워하는 생과 내가 그리워하는 생이 뒤섞이는 나라는 존재의 오묘함을 누리며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다는 우묵한 진실에 머리를 뉘고 잠에 들어야 합니다.


On Iiro rantala-Tears for Esbjörn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음악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고 그것은 그리움이거나 그리움의 먹이입니다. 잔인한 그들의 생태계의 순리와 다르게 그리움은 예상외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구석이 있어서 할퀴고 간 자리에 욱씬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남겨놓곤 합니다.

나는 이로 란탈로가 세상을 떠난 에스뵈욘을 위해 쓴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리움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얼마나 입자가 굵은 아름다움이 태어나는지 깨닫곤 합니다. 굵고 커다란 아름다운 감각은 음악을 듣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굴절시켜서 호락호락하지 않게 굽니다.

갑작스레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에스뵈욘을 그리워하지 않는 재즈팬은 없을 것입니다. 이로 란탈로의 그리움은 섬세하고 촘촘한 울림으로 뭍에 드러납니다. 물속 깊이 들어가 버린 그는 많은 그리움을 뭍으로 밀어냅니다. (에스뵈욘 스벤숀은 2008년 스쿠버 다이빙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로 란탈로의 눈물도 그곳에서부터 밀려온 파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악은 에스뵈욘만이 아닌 모든 그리움으로 옵니다. 먼지나 포말이 되어 그리움이 오래도록 뜯어먹는 먹이가 되어버린 많은 음악가들의 것으로 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든 순간이 됩니다. 이로 란탈로는 여러 번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솔로로, 미셸 볼리니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뉴 트리오와의 공연에서, 또 솔로 콘서트에서, 이로 란탈로 슈퍼 트리오(에스뵈욘 트리오의 멤버였던 마그누스 외스트럼과 댄 버글런드와 함께 한 콘서트. 2018년 한국에서 이뤄졌으며 이로 란탈로는 두 명과 함께 트리오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나 이 공연 이후로 무산되었다.), 에스뵈온의 트리뷰트 공연에서... 그도 아마 에스뵈욘을 위시한 수많은 그리움의 굵은 입자들을 굴려대며 이제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거대한 대상들을 향해 연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살다 보니, 문득 많은 그리움을 잊고 삽니다. 그리움을 잊는다는 것은, 나를 그리워할 사람들을 잊었다는 뜻과 내가 그리워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로 란탈로의 그리운 음악은 이 모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나를 그리워할 사람과 내가 그리워한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이 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비록 지금 눈물이 말랐지만, 너무 힘들고 고되어 온전히 그리움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지만, 음악으로 음악을 그리워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사람이 너무 오래 외로우면, 또는 너무 뱃머리에만 매달려 살다 보면, 껄떡이는 목숨 밑으로 끈질기게 이 생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그리움을 느끼지 못하면, 그때는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여름에 지독히 시달려 깔딱대는 잠과 헐떡대는 평온을 놓치고 그리워하는 법마저 잊게 된 이가, 설마 나뿐만이 아닐 테지요. 또는 질주하는 오토바이 굉음같이 요란했던 오늘 하루를 견디며 사느라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리움의 존재를 망각한 이들도 있겠지요. 그리움이 유령이나 괴물로 느껴지기 전에 그들을 다시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움의 생태계에서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생태계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불쌍하게도...


이로 란탈로의 이 곡의 여러 버전 중에 ACT의 솔로 앨범 <LOST HEROES> (2011, ACT)에 수록한 버전을 가장 좋아합니다. 늘 재기 발랄한 이로 란탈로가 고아한 소리로 마음의 결을 따라 내는 피아노의 타건은 그리움의 호흡을 재건합니다. 잃어버린 영웅(lost Heroes)을 위한 모든 그리움을 집약한 앨범에서 가장 잔잔하고 촛불 빛으로 일렁이는 음악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심경을 알 듯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과 나를 그리워하는 것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과 반려동물과 이제는 사라진 고향의 장소들, 또한 여전히 고향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는 남겨진 자들과 독일에서 나를 배웅해 준 사람들. 소화 18XX 연도가 기입된 나무 기둥의 낡은 집 담벼락의 시든 장미 넝쿨, 그 집 안마당에 묻어 두었던 김장 독과 그 위로 날래게 도망치던 토끼들, 기와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던 고양이 가족들과 칠이 다 벗겨진 베란다 너머로 인사하던 키 큰 외지인들, 새벽마다 서러움에 북받쳐 길가에 앉아 허밍으로 노래 부르던 노래방 도우미 여자들, 어느 날에는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서럽게 울던 빨간 단발머리의 여자, 어릴 적 사진에는 남아 있지만 이제는 없는 고무 타이어 그네, 그 옆에서 꼬불거리던 나팔꽃 덩굴들, 입구 처마 밑에 제비집이 있던 메밀묵집 할머니, 정선 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해장국집 할머니의 손 맛, 그리고 어제의 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따금씩 편지를 적어주는 제자들, 스승들, 나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을 처음 보여준 어느 옥탑방의 춥고 아름답던 별빛들, 그리고 늘 떠있어도 내가 올려다보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많은 별들의 이름과 부르지 않아 조용히 시들어가는 모든 꽃들, 그들의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구월 이일September Second.

On Michel Petrucciani Trio: September Second


(지나간 모든 9월 2일을 그리워함)



미셸 페트루치아니 또한 천재적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선척적으로 골형성부전증으로 평생 키가 90cm를 웃돌았습니다. 이로 란탈라의 앨범 <Lost heroes>에도 미셸 페트루치아니를 그리는 음악이 수록되어 있으며 현대 재즈사에서 빼놓지 못하는 위대한 재즈 피아니스트였습니다. 3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는 많은 이들의 단단한 그리움입니다. 9월 2일이면 늘 그의 September Second를 듣습니다.


Iiro Rantala - Tears for Esbjö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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