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대신

9화: 군웅의 기억

by 수원 박선생

9화: 군웅의 기억

서울 한복판, 화려한 불빛과 고층 빌딩 사이.

그늘진 골목,

거기엔 아직도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 아이들이 숨어 살고 있었다.

도심 재개발로 밀려난 폐건물 지하.

청소년, 탈가정 아동, 불법체류자, 그리고 버려진 아이들.

“여기… 군웅대신이 있어요.”

윤서린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군웅대신은 어떤 신이야?”

정우현이 물었다.

서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군웅은 이름 없이 죽은 수많은 전사들의 혼이 깃든 신령이에요.

전쟁, 억울한 죽음, 타인을 위해 살다 사라진 모든 이들의 넋.”

“힘은 있지만,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자.

세상의 뒤편에서 누군가를 지키다 사라진 사람들.

그들의 집합체가, 군웅이에요.”

[소리 없는 전장]

두 사람은 어두운 폐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구두굽 소리, 전등도 없다.

그저, 사람 냄새와 먼지, 숨죽인 인기척들.

그 속에 한 아이가 있었다.

17살.

눈빛이 날카롭고, 온몸엔 흉터가 가득했다.

“너… 이름이 뭐니?”

“이름 같은 거 없어. 다들 날 ‘개’라고 불러.”

정우현이 다가서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들었다.

“또... 날 이용하러 왔어?”

“…우린 널 이용하러 온 게 아니라, 너를 지키러 왔어.”

“지켜? 웃기지 마.

여기선 누구도 지켜주지 않아.

다 뺏고, 먼저 때린 놈이 이기는 거야.”

그 말과 함께, 아이의 등 뒤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악신이… 먼저 접근했어.”

서린이 말하며 부적을 꺼냈다.

“그를 감싸고 있는 건, 힘이 아니라 분노의 기억이에요. 군웅이 가진 고통…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을 외면당했을 때, 그 기운이 악신에게 먹히는 거예요.”

[가짜 영웅들의 등장]

그때, 지하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장을 입은 세 남자.

단체 급식 사업, 청소년 쉼터 운영자, 민간 치안 자경단장.

이들은 세간에선 영웅으로 불렸지만, 정우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사람들…이 아이들을 미끼로 삼았어. 사진 찍고, 후원금 받고,

도움 줬다는 명목으로 악신의 계약을 맺은 자들.”

윤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저 인간들이…군웅의 씨앗을 ‘도구’로 삼았어. 그걸 세상이 ‘영웅’이라 부른 거고.”

“그럼… 이 아이는...”

“군웅대신이 깃들었지만, 그를 지켜줄 진짜 영웅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힘이 안으로만 터진 거예요.”

[정우현의 선택]

정우현이 아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네 안에 있는 그 분노.

너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야.

이 사회가 널 ‘도구’로 삼았고,

누군가의 선행을 위해 네 슬픔은 연출된 고통이 되었어.”

“...!”

“근데 알아?

진짜 영웅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야.

너는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온 거야. 이 공간을, 여기에 있는 아이들을 지켜낸 거.”

아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안에서, 붉은 기운이 천천히 맑아졌다.

[군웅대신의 각성]

아이의 등 뒤에서, 수많은 칼과 투구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전장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환영.

자신을 위해 싸우지 못했던 이름 없는 자들의 영혼.

“나는…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신.

군웅대신이다.”

정우현은 조용히 공수를 읊었다.

“이름 없이 쓰러진 자여. 너의 기억은 지금, 깨어나리라.”

“누군가의 칭찬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칼을 들게 하리라.”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싸움이 아닌… 오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니.”

빛이 퍼지고, 거짓 영웅들이 두려움에 물러섰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 나도, 이름을 가져도 돼요?”

“물론이지.”

정우현은 손을 내밀었다.

“넌 이제, 진짜 전사야.

세상을 지키는 무명의 영웅.

군웅대신의 이름으로.”

� 다음 화 예고

10화: 봉인 해제

세 개의 열쇠—바리공주, 별성대신, 군웅대신—이 모두 깨어났다.

이제 선황대신의 봉인을 풀기 위한 의식이 시작된다.

하지만, 검은 교단의 교주 ‘이름 없는 무당’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신과 인간의 경계는 다시 한 번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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