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
살인자의 기억법
별점: ★★★★
추천 대상: 킬링타임용으로 읽을 소설을 찾으시는 분/ 지루하고 질질 끄는 소설이 싫으신 분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님을 몇 번 접하고 관심이 생겼다. <알쓸신잡>에서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대표작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어보았다. 내용이 짧고 굵어서,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철저하게 독자를 속인다. 정확하게 스토리를 이해하고 싶어 두 번, 세 번 계속 돌아갔지만 돌아갈수록 더 큰 미로에 빠지는 듯했다. 이 이야기의 서술자 때문이다.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김병수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다. 그의 일기를 처음 읽으면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자연스레 믿게 된다. 하지만 책은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전혀 다른 결말로 끝났다. 책을 덮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읽을 때의 나는 ‘기억’에 집중했다. 이건 그의 기억을 적은 일기인지, 그의 온갖 망상으로 뒤덮인 소설인지. 이야기 내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이게 사실인지 망상인지 자꾸 헷갈렸다. 단순한 서술조차도 의심하게 된다.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설정했을 때의 효과가 배가 되는 소설이었다.
참신한 서술 방식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질문도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정작 자신은 살인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을 잃어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죽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는 형사에게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했다면 제발 용서해 달라고 간곡히 빈다. 아무 과거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 미래도 떠올리지 못한다. 모든 길이 사라진 채 흰 백지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속죄할 수 없는 인간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속죄할 내용조차 까먹어버린 인간에게 우리는 어떤 죄명을 붙여줘야 하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죄와 벌은 계속 변화해 왔다. 언젠가 한 번, 교도소에서 수많은 인원을 특별사면시켰다는 기사를 들었다. 그만큼 현대는 과거보다는 죄에 관대하다. 이렇게 죄의 무게를 거론하며 자아도취에 빠지는 주인공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유령을 잡느라 수많은 시민을 죽인 정권, 사람을 얄팍한 틀로 마음껏 재단하는 사람들, 가장의 폭력으로 자라난 연쇄살인범까지. 다시 생각해 볼 만한 무거운 내용도 담겨있었다. 분량은 정말 짧으니 추리나 스릴러 장르에 관심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