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균형추는 내가 잡고 있어야지.
우연히 본 영화다.
같이 간 친구가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영화였고,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영화관에 따라나섰다.
사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걸 그레 즐기지 않는다. 유명하다고 한들,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고 한들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 심지어 일본영화라니,, 한 시간 동안 우동면만 뽑는 걸 보여줄 정도로 잔잔하고 극적 포인트가 없는 영화가 대부분인데 내 짧은 식견을 갖고 과연 영화관에 가는 것이 맞는 것일지를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 청소부이다.
영화 내내 그의 루틴을 따라가는데, 영화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그의 일상을 보여 준다.
새벽에 일어나 집과 몸을 정돈하고, 자신이 키우는 식물에 물을 주고,
늘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동전을 챙겨 매일 집 앞 자판기 캔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들으면서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한다.
점심시간에는 공원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사진을 찍고,
일을 모두 마친 후에는 공중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단골집에 방문하여 저녁을 먹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단조로운 히라야마의 일상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그게 단조로움이 아닌 알짜로만 꽉 짜여진 자신을 사랑하고 다듬는 매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처음 회사를 입사했을 때, 일하다가 갑자기 놀란 적이 있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 일을 한다고 치면, 이동하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을 빼더라도 나는 내 24시간 중에 거의 절반을 회사에 있네.."
하루의 절반을 일하고, 회사에서 좋으나 싫으나 회사 사람들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나 공포스러웠다. 당시에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고, 회사 사람들은 최대한 부딪히기 싫었으며, 주말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졸업이라는 공식적인 마침표가 있는 학교와 달리 회사는 (자발적 퇴사와 해고를 제외하고) 정년까지의 마침표가 너무나도 길고 길었다.
당시 막 변호사가 된 나는, '내가 이 직업을 평생 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절망적이었다.
매일매일을 버티는 게 힘들어 이건 아니다 싶어, 학교 다닐 때처럼 내 마음대로 3년이라는 직업졸업일을 정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나에게는 내 방 하나 청소 못하는 내 삶은 뒷전인, 그런 삶이었기에
오히려 내 삶이 빼앗긴 기분이었다.
영화에서 도쿄 공중화장실의 청소부에 대한 평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근처 공원에서 엄마를 놓쳐 길을 잃어버린 꼬마아이를 달래주고 손을 잡아 걸으면서 엄마를 찾아주는 장면이 있다. 잃어버릴 뻔한 아이를 찾아준 주인공에 대한 고마움은 없이, 주인공을 위아래로 훑으며 아이를 건네받고 아이의 손부터 물티슈로 닦아버린다. 남들은 주인공을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사람 정도로 보겠지만, 주인공의 일상을 같이 보내다 보면 절대 그는 그를 남들의 평가와 같이 두지 않는다. 누구보다 정갈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유지하며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신을 제일 최고의 컨디션으로 대접해 준다.
주인공과 같이 일을 하는 철없는 청년이 어느 날 주인공에게 물었다.
"어차피 더러워질 거 왜 그리 장비까지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청소하냐"
주인공은 청소를 위해 자신의 도구와 장비들을 모두 들고 다니고 늘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한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아름답게 채우기에, 자신의 삶의 연장선인 일도 그렇게 단정하고 좋은 마음으로 늘 일상 중 하나로써 해나갈 수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인 편견이 어떠하든 자신의 일에 프로다움이 나의 예전을 반성하게 했다.
SNS에 표현하는 방식만 다를 뿐 사람들은 매일의 루틴을 잘 포장하여 공유한다.
그 매일의 루틴 앞에는 항상 "어떠한 삶의 모습을 동경하는지"의 수식어로 포장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의 USP가 되어 챌린지까지 이어진다. 게으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에서는 반대로 얼마나 하루를 충실하고 알차게 보내는지 갓생루틴이 온 SNS 피드를 지배했고, 멋있는 외국 언니들은 어떻게 하루를 사는지 댓걸 루틴도 한창 공유되었다. 미라클 모닝 역시 마찬가지다. 과할 정도로 몇 시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고 어떤 루틴을 쪼개서 사는지를 보여주며 마치 그것이 미덕인 마냥 한때 퍼졌었다.
미라클 모닝이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나는 할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이른 기상시간의 바이오리듬을 갖고 있었다. 중학생 때는 8시-9시 사이에 잠들어서 새벽 2-3시에 깨고, 그렇게 조용히 새벽시간에 할 일을 하며 학교 가기 전에 나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때 다른 친구들이 모두 야자를 하고 새벽에 밤을 새우고 학교 수업시간에는 오히려 조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4당 5 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는 말을 하며 잠을 줄이고 더 공부하라고 하는 분위기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인생은 시험의 연속과 끊임없는 입시로 가득 채워졌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번도 밤을 새거나 5시간 이하로 잠을 줄여본 적이 없다)
누가 뭐래도 그게 내 삶의 방식과 리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 법대에 들어가 시험 준비를 할 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라고 생각하며 집단의 문화인 "스터디하기, 생활조와 같이 밥 먹고 도서관 가기,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기"등 그 집단의 루틴에 맞게 한번 살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새로운 환경에서는 다수의 루틴에 맞게 같이 헤엄쳐야지 목표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렇지만 결과는 무엇 하나 얻지 못하는 걸로 끝났다. 내 루틴은 깨졌고,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으며, 몸만 망가졌다. 다시 원래 나의 방식대로 공부하고 생활하니 훨씬 좋은 성적과 푹 자서 늘 탱탱한 얼굴도 덤으로 따라왔다.
루틴을 따라가기 위해 후발적으로 내가 그에 맞추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틴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냥 우리는 인생을 사는 주체인 거고, 이 인생을 살면서 그냥 내가 편한 방식의 "쪼"가 생기는 것이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습관화되기를 우리는 다듬을 뿐이다.
주인공은 누구보다 꾸준하게 자신만의 루틴을 갖고 있다. 그 루틴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켜켜이 쌓여 그간 자신의 루틴이 하나의 공식 같은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루틴은 칸트의 계획과 같은 루틴이나, 수험생들의 시간계획표나 혹은 MBTI의 "J" 계획형 인간들의 투두리스트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냥 몸에 밴 것 같은 것이었다.
다듬어진 습관은 삶의 균형추가 된다.
그리고 그 루틴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내 삶을, 타인이 아닌 내 스스로가 컨트롤한다는 것은 내가 곧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이기에 더더욱 세상이 정한 정답이 아닌 내가 편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다듬어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루틴의 중요성은 그것이 깨졌을 때 더욱 실감한다. 작은 루틴이라도 얼마나 내 삶의 균형점이 되었는지는 그것이 외부에 의해서든 내 스스로든 균형을 깨었을 때, 도미노처럼 흐트러지는 연속적인 불균형을 보게 되면 작은 루틴이 나를 늘 지탱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매일 행하는 행동들은 나를 꾸준하게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는, 내가 나도 모르게 의지하는 공식임을 깨닫게 된다.
(늘 나이스하고 세상에 온정이 넘치는 주인공이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가 무단으로 결석하면서 본인을 위해 남겨두었던 시간을 그 공백을 메우는데 쓰게 되고 그로 인해 처음으로 화를 내는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사이트와 취향은 흉내낼 수도 없고, 쉽게 따라 한다고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인사이트나 취향에 "우와"하고 감탄을 한다면, 그건 그 짧은 문장 혹은 우리에게 도달한 장면에 대한 감탄이 아닌 그 수면 위에 보여지는 취향과 인사이트 기저에 깔린 99%의 빙산과 같은 시간과 노력들에 대한 감탄인 것이다.
인사이트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환경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취향 쌓기"라는 소모임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그건 "취향 따라 하기"로 바꿔줘야 할 것만 같은 못된 마음도 든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매일 차를 타고 듣는 카세트테이프의 음악들, 정갈에게 집에 놓여있는 책들을 보면 서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걸 꾸준히 쌓고 계속 발전시킨 시간이 보인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동료는 그걸 단순히 돈으로 보고 빈티지샵에 팔아버리지만, 그건 단순히 환가 할 수 있는 테이프 중 하나로 두기에는 너무나도 귀한 주인공의 세월이다. 주인공이 매일 찍는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도 왜 사진을 저렇게 찍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꾸준하게 코모레비를 쌓아가는 그 시간이 대단해 보인다. 꿈에서 자주 마주하는 어두운 이미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가정환경을 그렇게 코모레비로 풀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곁들이며..
코모레비
정말 짧은 찰나이고, 그렇기에 그냥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들은 한다.
It only exits once, at that moment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은 매일 온다. 매일 주인공이 다른 형태의 코모레비를 사진으로 담듯,
우리의 매일도 코모레비가 다른 모습으로 쌓여서 완성된다.
어떻게 순간순간을 대하는지의 삶의 태도로, 궁극의 내가 완성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집에 다시 돌아오면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가는데 왜 이불정리를 매일 해?"라는 말에 예전에는 반정도 수긍한 적도 많았다. 너무 바쁘면 제일 먼저 손에 놓는 것이 나를 위한 습관, 사소해 보이는 어떤 것들이다. 합리화를 하면서 넘겨버린다. 그런데 습자지가 쌓이면 절대로 못 뚫는 철벽이 된다고 하더라. 매일 습자지 같은 습관들은 곧 내가 나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태도이고, 그게 쌓여서 습관이 되고 결국 취향이 되고, 그게 곧 내 인생이고 내가 되더라.
그걸 깨달은 후로부터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부지런함을 강요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가 제일 나를 사랑하는 방식의 행동들을 습관처럼 뚝딱뚝딱해내고 있다. 그렇게 삶의 균형추를 지키고 단단하게 만들며, 내가 나를 제일 사랑해 주려고 오늘도 부단히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