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토요일] 잠재된 성숙함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마태 5, 48)

by 어엿봄

그녀는 내게 답장을 하지 않는다. 이유를 알 수 없다. 하루는 내게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또 다른 하루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아리송한 태도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에 대한 의심을 키운다. 뭔가 내가 실수라도 한 것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나를 대하지 않게 하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5-48)


애초에 나의 실수는 없었다. 내 행동과 말, 혹은 존재의 일부분이 그녀를 자극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불안정한 자기 탓에 내가 불안할 이유는 없다. 하느님은 한 처음부터 그녀에게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당신이 창조한 생명에 대한 책임으로 하느님은 그녀를 사랑으로 보살피신다.


내가 정말 사랑하기 힘든 내 이웃들이 있다. 그래, 원수라고 치자. 아무 까닭 없이 나의 불안을 일으키는 그 사람들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에게 어떠한 권리도 지니지 않은 그들의 폭력을 고스란히 떠안을 의무가 나에게는 없다. 다만 여전히 마음은 아프다. 그들이 내게 행한 '죄'에 아픔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용서했다고 말하기도 싫다.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행한 죄에 아픔을 느끼길 바랄 뿐이다. 때로는 의식되지 않은 자신의 언행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그들이 먼저 스스로와 화해하기를 빌어줄 뿐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불안한 내적 구조가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여기까지다. 상대를 향하여 솟구치는 분노와 두려움을 안고 나는 내 구원의 여정을 이어간다. 나는 내 평화와 기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하늘의 아버지는 완전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자녀인 나는 그분을 닮았다. 애초에 나는 그 완전함의 씨앗을 품고 태어났으니, 나는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완전히 자유롭게 내 삶을 누리고 싶다. 나는 믿는다. 성숙하게 너와 나를 구별해 낼 줄 알고, 또 안정된 나로서 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내재된 완전함을 신뢰한다. 하느님의 숨이 내 안에 살아 있는 한, 나는 내 잠재된 모든 것을 꽃피워낼 수 있다. 그러니 악인에게도 떠오른다는 당신의 해와 비가 그저 반갑다. 그의 불안함에 내 손과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는 그렇게 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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