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8)
당신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습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버선발로 달려 나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의 청이 당신 귀에 닿기도 전에 그렇게 당신은 나에게 사랑을 주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마태 7, 7-12)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무엇을 청하고 구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한참 동안 작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드디어 먼발치에서 그를 발견하고 달려 나온 아버지가, 그리던 아들을 꼭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나를 갑작스레 안아 버린 하느님을 만났다.
해야 할 말을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정중히 문을 두드려야 했을 텐데, 숨을 고를 틈 없이 문이 열렸고 그가 나에게로 왔다. 참 따뜻했다. 그의 온기가 아직 콩콩 거리는 내 심장을 달래주었다.
세상에 청할 건 참 많았다. 가닿지 않았으리라 여겨진 작은 바람들에 가슴이 답답해졌었다. 우리는 몇 번을 더 신에게 부르짖어야 하는가? 숱하게 많은 목숨을 창자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 잃어야 했다. 이유는 없었다. 내세의 복락이 얼만큼 값지길래 이 매일의 슬픔을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는 말인가. 가끔은 예수의 십자가가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취하고 직접 죽음을 통과했단다. 그 교환으로 우리는 귀한 생명을 보존했단다. 그러나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그의 십자가 보다 더 무거웠다. 미안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아 홀로 버려진 가운데 병들어가는 몸과 마음을 겨우 이끌고 거리를 헤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저 높이 솟은 십자가의 구원이란 말이.
작은 아들이 외지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해 버리고 돼지를 치다 그 마저도 녹록지 않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이전에 누린 부유함과 정에 그리움을 느꼈을 때, 이미 그는 축복되었다. 사랑을 바라는 그 마음이 이미 축복되어, 언제나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두드렸다.
허공을 울리는 우리의 울부짖음이 이대로 끝은 아니다. 혼신 다해 깎고 새긴 그 마음이 사라질 리 없다. 단지 우리 몸이라는 한계가 고통의 시간과 공간을 조금 더 늘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몸의 한계를 신이 직접 취한 까닭은, 우리가 그를 스스로 벗어나 무한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한계를 취하여 우리가 알고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내가 팔을 벌린 만큼 그가 내 안에 들어온다. 나 역시 손 끝에 힘을 주어 그를 꼭 끌어안는다. 몸이 느끼는 따뜻함이, 내 마음의 긴장을 풀어버린다. 내가 홀로 느낀 텅 빈 가슴의 메아리가 이미 그를 울렸다. 그리하여 이미 축복되었단다. 그렇게 내가 값지게 살아있단다. 당신이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안에 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내 한계로는 모두 받아 안지 못할 만큼의 복이 쏟아지리라. 모든 걸 신비로 남겨두기엔 무책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무책임함으로, 나를 당신이란 세계에 모두 던져버린다. 완전히 열어젖힌 나로 당신 안에서 축복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리라. 그 누가 아는가. 거리를 헤매고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을 나 또한 안아 줄 수 있을지, 그렇게 열린 사람으로서 그가 원하는 걸 이뤄줄 작은 희망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