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8)
내가 그대에게 아낌없이 쏟는 마음만큼 나도 그대에게 받을 수 있단 확신이 든다면 좋겠다. 나는 그대가 나의 작은 바람들을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길 바랐다. 내가 그대를 응원해주고 싶은 만큼 나는 그대의 응원이 필요하였다. 내 마음의 크기가 너무 작았을까 아니면 가닿기엔 그대가 너무 멀리 있었을까. 채워지지 않은 마음 한 구석의 허기를 느끼며 돌아선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6-38)
누군가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어제는 울더니 오늘은 활짝 웃는다. 어제는 함께 산책을 가자하더니 오늘은 문을 닫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또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그 원의에는 잘못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들, 솔직한 마음들이 심판 혹은 단죄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냥 누군가는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열정과 힘을 쏟아 진행한 일이 엎어졌을 때 나는 속상하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해보고 싶다. 나를 믿고 기다려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욕심"이 그렇다고 "잘못"은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얼마나 그 이유에 귀를 기울여주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화내고 싶고, 내 뜻을 우선하고 싶고, 아니다 싶을 땐 도망가고 싶고, 남들보다 더 똑똑해지고 싶고, 이름 날려 성공하고 싶고, 많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싶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고, 보살펴주고 싶고, 자유시간을 가져 놀고 싶은 이 모든 욕구들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할 힘이 된다. 그 욕구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맺는 결과들에는 달리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혹 화를 내는 방식이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았는지, 내 뜻대로 하고 싶어 공동의 규칙을 거스르진 않았는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모든 바람을 인정해주고 싶고, 축복해주고 싶다. 그런데 왜 나는 그대와 나 사이에서 여전히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가. 주고받음의 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사랑은 말이다. 언제나 존재한다. 사랑을 낳으신 그분께서 당신만의 셈과 방식으로 늘 채워주신다. 내 마음의 욕구들과 그대의 그것들을 애초에 허락하신 그분께서 내가 주는 만큼 채워주신다.
공동체의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고 답답함을 느꼈었다. 내 지향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질 않는다. 내가 바란 건 그저 이해와 존중이었다. 억울했다. 내가 안간힘 써가며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했던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나는 때로 너무 극단적이다!). 한숨 내쉬며 우연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한숨 놓칠세라 언제든 귀를 열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사실 그렇게 힘이 있는 이들은 아니다. 내가 속한 기관들의 책임자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도 못한다. 그들에게 시험을 볼 일도, 그들에게 생활비를 청할 일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힘을 지녔다. 그 힘으로 나를 지탱해 준다.
"괜찮아. 너의 마음이 틀리지 않았어. 네가 어떤 이유로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인지 적어도 나는 이해해. 나는 너의 편이야." 어느 날 뒤돌아봄 없이 무작정 쓰러져도 나를 지탱해 줄 대단한 힘이다.
내가 주는 만큼 그대가 갚아주지 않아도, 그러니 괜찮다. 나의 주님은 나의 "되"의 쓰임새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퍼주는 만큼 그분은 계속 채워주신다. 내 주위의 작은 이웃들을 통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