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의 얼굴,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
어린 시절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때로는 달콤한 칭찬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보이지 않는 족쇄와 같았다.
중학교 시절, 낯선 여자애와의 설렘 속에서 마주했었던 순간에 들었던 "넌 착한 아이라고, 친구가 얘기해 줬어."라는 말은 풋풋하고 두근거리던 감정을 잠재우는 동시에, 나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두는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아이 앞에서 또다시 '착한 아이'라는 역할극을 시작했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착하다'는 말은 내게 썩 유쾌한 칭찬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그 말은 순진하고 어리숙한 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고, 매력적인 이성에게는 어필하기 어려운 숙맥처럼 여겨졌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나를 '착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만들었기에, 감히 그 틀을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게 길들이기 위한 고도의 세뇌교육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착한 아들'이라는 명목 하에 부모님의 기대를 짊어지고, 누나들의 맹목적인 강요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그 요구에 따랐던 과거는 나쁘게 생각하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결혼 후 그 무게는 고스란히 아내에게 향했고, 늘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착한 사람'이라는 칭호는 점점 더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일부러 냉정하게 선을 긋기도 하고,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때로는 모진 말도 서슴지 않았지만, 결국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 착한 사람이 화내니 더 무섭네."라는, 나를 다시 그 틀 안에 가두려는 듯한 말들이었다.
'착한 사람'이라는 정의는 참으로 모호한 것 같다.
이득을 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손해가 더 컸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쉽게 부탁했고, 때로는 나의 순한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속셈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씁쓸함은 이루 말할 수 조차 없었다.
물론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내가 웬만큼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며 쉽게 이해해 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착한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스스로의 강박 때문에, 하고 싶은 행동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제약이 따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상황과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마음속으로만 웅크리고 있던 생각들을 때로는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거다.
'착하니까 안 돼'라는 소극적인 판단 대신,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도 괜찮아.'라는 좀 더 적극적인 실행을 통해, 업무, 금전, 생활, 인간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억누르고 있는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표출하고 싶지만, '착한 사람은 그러면 안 돼'라는 굴레에 갇혀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누가 먼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제 그만 착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주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주변의 누군가는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정작 큰 문제는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앓으며, 스스로를 억압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어도 괜찮은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도 때로는 '착한 사람'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욕구를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래서, 우선은 나부터 먼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놓아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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