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숨을 쉬기 위해 허락된 빈자리

여백(餘白)

by 시절청춘

마음의 방



내 마음속
나도 모르게 생겨난
알 수 없는 공간

너를 향한 것이
정말 진심이었는지
나조차 묻게 되는 밤

그저 가볍게 웃고 싶어
마음 한 자락만
슬며시, 꺼내어 둔다

어지러운 마음들은
이제 다 비웠다고
훌훌, 먼지처럼 털어낸다





우리는 흔히 그림이나 글에서 비어 있는 공간을 두고 '여백(餘白)의 미(美)'라 부릅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다 남겨둔 빈 공간을 두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렇게 부르곤 하죠.

어쩌면 다 채우지 못한 게으름이나 미완의 서투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백의 본질은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여백이란 단순히 '비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의 공간입니다.


"숲이 울창한 이유는 나무와 나무 사이, 바람이 지나갈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무를 심을 때도 우리는 일정한 간격을 둡니다.

장차 나무가 자라나 차지할 공간을 미리 배려하는 것이죠.

너무 가까이 심긴 나무는 뿌리를 뻗을 길을 찾지 못해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아무리 울창한 숲일지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바람이 통하는 '바람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없다면 나무는 숨을 쉴 수도, 생존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 또한 그 빈 길을 걸으며 산림욕을 하고 생기를 얻습니다.

만약 틈 하나 없이 빽빽하다면, 그곳은 바람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죽은 숲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움직이면 넘치고 흘려버리지만, 적당한 여백을 두고 담으면 흔들림 속에서도 온전하게 옮길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떠한가요?

낮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어깨를 맞대던 시절엔 물리적 공간은 좁았을지언정 마음의 답답함은 덜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온기가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금의 도시는 고층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하늘을 가린 '콘크리트 숲'입니다.

바람길은 겨우 숨통만 틔워줄 뿐, 탁 트인 전망과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바다로, 산으로 떠나려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잃어버린 '여백'을 찾아 숨을 쉬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과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차 없는 계획과 완벽한 실행은 대단한 능력이지만, 쉼표 하나 없는 삶은 인간미를 앗아갑니다.

틈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짐들을 보며 우리는 깨닫습니다.

'언젠가 쓰겠지'라는 믿음으로 꽉 채워두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공간을, 그리고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비움'이 요즘은 최고의 재테크이자 마음 수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여백을 만들고 비움을 실천하는 것은 곧 나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일입니다.

30대 중반, 저는 휴식도 잊은 채 일에만 매진하던 지독한 일중독자였습니다.

출근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낄 만큼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그 덕에 지금의 인정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독한 후회가 남습니다.

여유가 없었기에 가족을 온전히 돌보지 못했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입니다.


여전히 제 안에는 일과 조직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바꾸고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내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집착할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갑니다.


이제는 그 집착을 비워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성향이 있고, 조직은 그 다양함 속에서 굴러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움의 시작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지금 사무실 한편, 불필요한 물건이 담긴 작은 박스 하나부터 과감히 정리해 보려 합니다.

다가오는 시간들 앞에서는 여러분과 저 모두, 내 안의 묵은 것들을 기꺼이 비워내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 맑은 바람과 새로운 여유가 깃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비워내는 일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Carat 생성 (나노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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