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서는 용기 4
이사를 준비하다 보면, 정말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낯선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그 물건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 당시의 추억이 소환된 듯, 먼지를 털어내고 이리저리 만져보며 감상에 젖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내에게 "짐 안 싸고 뭐 하냐"며 혼나기도 하지요.
저는 물건 욕심이 참 많은 편입니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일단 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문제는 한 가지 품목에 꽂히면, 질 좋은 제품 하나를 진득하게 쓰기보다 "싸고 좋은 게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 모은다는 점입니다.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건지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서랍 속 깊은 곳에 방치되거나 이사 철이 되어서야 빛을 봅니다.
정작 필요할 땐 어디 뒀는지 몰라 또 새로 사고, 나중에 정리하다 보면 똑같은 물건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분리수거장으로 직행하는 허무한 굴레를 반복하죠.
가끔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 튀어나와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가족과의 추억이라면 웃어넘기겠지만, 이미 인연이 다한 과거의 흔적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물건 하나 때문에 현재의 평화를 깨뜨리고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용도가 폐기된 물건이든, 시효가 지난 인연의 흔적이든 과감히 비우고 정리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겁니다.
불교에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억지로 잡으려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예전에는 '동창'이나 '고향 친구'라는 말에 애틋함을 느꼈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무리 어릴 적 절친이라 해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요.
이해관계가 얽히는 순간 친구 사이는 멀어지기도 하고,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나?" 싶은 씁쓸함을 남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람 관계도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각자의 삶의 궤적에 따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모든 사람을, 지나간 인연까지 다 품고 가려한다면 내 배가 너무 무거워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도 물건처럼 정리가 필요합니다.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흘러 감정의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서로의 길이 너무 달라졌다면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에게 미련 없이 다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꽉 찬 서랍에는 새 물건을 넣을 수 없듯, 마음의 방도 비워야 새로운 인연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요.
자동차도 노후되면 새 차로 바꾸는데, 낡은 습관과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제 인생에 대한 과소비이자 사치일지 모릅니다.
비우고 덜어내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인생 후반전이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금껏 저를 채우고 있던 낡은 방식과 습성들을 최대한 비워내려 합니다.
한때 좋아했던 것들, 익숙했던 인연들도 다시 한번 점검해 봅니다.
이제 또 다른 '시절인연'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담아내기 위해 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있습니다.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 입듯, 익숙함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려 합니다.
빈 그릇이어야 가장 맑은 물을 담을 수 있을 테니까요.
새로운 삶을 채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묵은 인연과 물건을 미련 없이 비워내는 '용기'입니다.
《이적 - 빨래》
[Gemini 활용 이미지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