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단단한 나의 익숙함을 긍정하기로 했다

용기 ― 익숙함을 떠나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by 시절청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만큼 한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긴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태어나서 7년 남짓 부모님의 품에서 자라고, 12년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배웁니다.

그 후 대학을 거쳐 20대 중후반쯤이 되면 비로소 독립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들과는 다소 다른, 특수하고도 독특한 직업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익숙한 것은 단정한 제복, 그리고 상명하복의 엄격한 위계질서였습니다.

절도 있는 말투와 유사시를 대비하는 강도 높은 훈련이 제 삶의 기본값이었습니다.

이 직업의 특성상 저는 늘 피가 끓는 젊은 청춘들과 함께 생활해 왔습니다.

푸릇푸릇한 청년들 사이에 섞여 있다 보니, 종종 저 자신이 나이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처음 군복을 입었던 갓 스무 살 무렵이 떠오릅니다.

당시에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형 같은 병사들과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지냈습니다.

은연중에 '간부가 병사에게 기가 눌리면 안 된다'는 강압적인 교육이 있었고, 병사들 역시 어린 신임 간부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길들이려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지금은 간부와 병사 간의 다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때는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수많은 부대원에게 둘러싸인 갓 스무 살의 어린아이. 그것이 제 사회생활의 맵고 쓴 첫 시작이었습니다.

당시엔 엄청난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는데, 어느덧 아이들이 제 아들보다도 어리고 그들의 부모조차 저와 동년배이거나 더 어린 세월이 되었습니다.

36년. 강산이 세 번하고도 반이나 바뀌는 아득한 세월입니다.
15년 전쯤, 아내와 함께 제가 고등학생 때 자취하던 동네와, 신혼 초 처음으로 함께 살았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고, 산 뿐이던 동네가 화려한 신도시로 탈바꿈해 버린 탓에 도무지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낯선 거리를 서성거리며, 세월의 흐름 앞에 형태가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풍경은 변했지만, 36년간 한 직장에 머물러온 제 모습은 어떨까요.

저는 사회와는 조금 다른 이 특수한 문화에 너무나 깊이 길들어 있습니다.

짧은 머리 모양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투에서 금세 표가 난다고들 합니다. 일반인들이 듣기엔 다소 딱딱하고 부담스러울 정도의 각 잡힌 존칭을 쓰고 있으니까요.
다행히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시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굳어있던 말투와 감성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제 인생 후반전을 앞두고 한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한동안 이 철저히 적응된 생활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 인생의 60% 이상을 입고 있던 옷이니까요.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제게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꿰입으려 한다면, 옷이 찢어지거나 헐렁해서 우스꽝스러워질 것입니다.

기성복 바지를 사면 자신의 허리에 맞추고 기장과 통을 줄여 입듯, 제 인생의 후반전도 그런 '수선'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36년간 입었던 익숙함을 무 자르듯 억지로 버릴 수는 없겠지만, 제가 새롭게 서야 할 세상에 맞춰 조금씩 품을 조절하고 다듬는 연습 말입니다.


그 수선의 과정에서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36년을 버티게 해 준 성실함, 책임감, 그리고 정직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전반전의 모습을 다 지우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투가 조금 딱딱하면 어떻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책임을 증명하는 언행일치의 삶이니까요.


저의 오래된 습관과 태도가 곧 저라는 사람의 품성입니다.

어르신들이 낡고 투박한 옛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아끼는 이유는, 아무리 좋은 신제품이 나와도 오랜 세월 자신의 손에 길들여진 익숙함만큼 편안하고 완벽한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묵직한 익숙함이야말로 제 인생 후반전을 든든하게 받쳐줄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궤적이 묻은 낡은 익숙함은 억지로 벗어던져야 할 허물이 아니라, 인생 후반전을 개척할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무기이다.


《동물원 - 변해가네》

https://youtu.be/NFFbhrBQVrw?si=1p357m1LO6A6MXVv


[Gemini 활용 이미지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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