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감(피부가 물체와 접촉할 때 느껴지는 감각)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지우개 하나,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
두 눈을 가만히 감고
연필을 쥔 손에 힘을 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숨을 고른다.
커피 한 모금에 몸을 녹이고,
종이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뾰족한 연필 끝과 뭉툭해진 지우개를
번갈아 바라본다.
사각사각,
손글씨로 채워나가는 하얀 공간.
빈 종이는 어느새
나의 체온이 담긴 글자들로 빼곡해진다.
손가락 마디마디 찌르는 통증에
때로는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적지만,
하얀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쓰는 손글씨만이
내 깊은 마음을 온전히 덜어내는 듯하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날카롭게,
때론 가슴속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나는 오늘도 그렇게 시를 완성해 간다.
"세상의 모든 단단한 것들은 사실 누군가의 부드러운 인내로 빚어진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쓰던 자그마했던 어린 시절의 손.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예쁘게 적어보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씨 참 예쁘다"는 칭찬을 자주 듣다 보니, 저는 무언가를 손으로 적는 행위 자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유행하는 노래 가사를 빼곡히 적어보기도 하고, 책에 있는 좋은 구절을 그대로 베껴 쓰기도 했죠.
때로는 공부를 위해 필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필기를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명필이라 불릴 만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제 글씨는 참 보기 좋고 단정했습니다.
남자들의 힘 있고 굵은 서체가 아닌,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글씨체였죠.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제 글씨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제 손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손가락에 유난히 두꺼운 손바닥과 손등.
주먹보다 따귀가 더 아플 것 같은 솥뚜껑만 한 손이었습니다.
낭만적으로 기타를 배우려 했지만, 짧은 손가락과 두꺼운 손바닥 탓에 기본 코드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장갑을 살 때도 손바닥 둘레에 맞추다 보니 늘 손가락 끝이 헐렁하게 남는 큰 치수를 사야만 했죠.
분노가 치밀어 올라 혼자 벽을 치다 손이 퉁퉁 부어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투박하고 상처 난 손으로 펜만 쥐면 여전히 예쁘고 부드러운 글씨가 흘러나왔으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성스레 꾹꾹 눌러쓴 손글씨가 펜팔로 이어져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해 준 붉은 실이 되었으니, 지금은 이 못생긴 손과 부드러운 글씨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정성을 다해 글씨를 쓰다 보니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엄지손가락 두 번째 관절의 인대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언제 뼈가 어긋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제 손가락의 뼈가 어긋난 것은 '며칠 아프다 말겠지' 하고 안일하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30여 년을 묵묵히 버티다, 결국 젓가락질조차 힘들고 글씨를 쓰는 것마저 고통스러워져 뒤늦게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아직은 젊은 나이를 핑계로 인공 인대를 연결해 억지로 고정해 둔 상태지만, 지금은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참으로 벅찹니다.
진통제를 삼키며 겨우 시 한 편을 적어 내려갈 때면, 욱신거리는 관절염 탓에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듭니다.
자판을 두드릴 때도 오래된 습관처럼 오른손 엄지로 스페이스바를 누르다 보면 찌릿한 통증이 몰려옵니다.
'젊은 시절 다쳤을 때 제대로 치료만 받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두꺼운 손 탓에 장갑 고르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관절의 통증 때문에 그 좋아하던 가죽 장갑마저 낄 엄두를 내지 못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손글씨 적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옛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과 손글씨가 제 삶에 공존할 수 있도록, 요즘은 통증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펜 잡는 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서투르고 예전의 그 예쁜 글씨체가 나오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지만, 평생을 묵묵히 버텨준 이 귀한 손과 더 오래오래 동행하기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 할 과정이겠지요.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땐 제 손가락부터 챙기겠지만, 저는 못생기고 퉁퉁 부은 제 손가락 관절이 안고 있는 이 통증마저도 제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려 합니다.
어쩌면 36년의 험난한 시간을 버티고 지금의 단단한 저를 만들어 준 결정적인 계기 역시, 이 지독한 손가락의 통증을 매일같이 다스리고 이겨내며 펜을 쥐었던 그 '부드러운 꾸준함' 덕분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매끄러운 펜촉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펜을 고쳐 쥔 투박한 손마디에서 탄생한다.
《김진호 - 가족사진》
[Gemini 활용 이미지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