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의 백지(白紙) 앞에서
지금 이 깨끗한 하얀 여백은
내 안의 마음을 쏟아내라며
가만히 손짓하고 있는
매혹의 공간이다.
나의 가슴속 깊은 이야기들,
내가 꿈꾸는 훗날의 모습과
내가 살아온 지난 일상이
내 손끝에서 어떻게 담길지 기다리는 곳.
때로는 웃음 가득하게,
때로는 행복 가득하게,
때로는 아픔 가득하게,
때로는 눈물 가득하게.
내 손끝에 머무는
작은 움직임 하나,
그 움직임이 남기는
나의 깊은 생각 하나.
한 글자 한 글자 적었다가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얀 여백은 채워지고
그곳은 온전한 나의 공간이 되어간다.
어쩌면 여백이란,
그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말들로
가득 차 있는 설렘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저는 이제 명령에 따르던 삶을 서서히 끝내고, 오직 내 마음의 문장을 따르는 삶으로의 전역(轉役)을 앞두고 있습니다.
인생의 전반전을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저는 과연 어떤 문장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다가올 후반전의 하얀 백지 위에는 어떤 멋진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게 될까요.
돌아보면 저의 전반전은 참으로 치열하고도 굴곡진 변화의 연속이었습니다.
때로는 남들보다 너무 앞서간 탓에 오해를 사고 곤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조금 더 신중하고 집요하게 파고들려 했던 저의 기질이 가끔은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죠.
90년대 초중반, 선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미래를 준비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병사들에게 워드 작업을 지시하기 전, 제가 먼저 직접 배우고 익혔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야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명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군대는 '간부는 지시하고, 실행은 병사가 하는 곳'이었습니다.
직접 키보드를 두드리는 저를 보며 누군가는 "간부 자질이 없다", "할 일 없는 간부"라며 구박과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본격적으로 PC가 보급되고 간부들 대상으로 정보화 평가가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는 남다른 일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자리를 옮길 것이며, 누구도 나를 강제로 바꾸게 하지는 않겠다."
30대 초반의 제가 가슴에 품었던 독한 다짐이었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 그곳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저는 부단히 배우고 시도했습니다.
남들보다 비상한 머리가 없음을 알았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간절함으로 꾸준함을 무기 삼아 치열하게 버텼습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저 자신도 40대 중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심해로 추락하며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 백지를 찾을 수도 문장을 적을 수도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냈고, 다시 밝은 세상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임을 제 삶 스스로가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제 저는 후반전을 맞이하는 출발선에 도달했습니다.
이 하얀 백지 위에 어떤 문장을 채울지 기분 좋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채울 단어들은 이미 제 안에 하나둘 모여 있습니다.
어떻게 조합할지 조율하는 과정만 남았을 뿐입니다.
남들보다 화려하고 뛰어난 문장을 적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에게 꼭 맞는 문장, 저와 제 가족이 함께 미소 지을 수 있는 따뜻한 문장, 저의 행복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다정한 문장을 적어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 인생 후반전의 첫 문장을, 저는 이렇게 시작해 보려 합니다.
36년 동안 수만 번의 오늘을 맞이했지만, 오직 나만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오늘 아침은 처음 만나는 계절처럼 낯설고도 따뜻하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모아, 저만의 행복한 후반전 문장들을 아름답게 완성해 가겠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화려하게 빛났던 사람이 아니라,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토이 - 스케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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