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정전을 다시 돌아보다
이번에는 경복궁 근정전 옆으로 난 문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문을 나가자 꽤 규모 있는 전각이 보이는데요. 그 앞으로 관람객을 위한 카페도 있네요.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도 여유 있어 보이고요.
저희 앞에 있는 전각은 바로 수정전(修政殿)입니다. 수정전은 경회루 연못의 남쪽에 위치해 있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늘은 궁궐을 보는 아주 유용한 Tip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궁궐에서 적용 가능한 Tip이니 잘 기억하셨다가 적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궁궐에서 적용 가능한 유용한 꿀팁! - 궁궐에서 전각들의 등급을 확인하고 싶다면?!
제가 경복궁 산책을 막 시작하면서, 궁궐의 건물들, 즉 전각들은 각자의 등급, 그러니까 건물의 격과 역할이 나누어진다고 말씀드렸죠? 이것을 좀 더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전각 이름의 가장 끝부분을 보면 됩니다.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루(樓)/정(亭)
이 여덟 글자를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으면 좋은데요. 대부분 이 순서로 궁궐의 전각들의 등급, 즉 격이 정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먼저 우리가 초반에 열심히 둘러봤던 경복궁 내의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은 모두 뒤에 전(殿)이 붙죠? 왕이나 왕비 등과 관련된 격조가 높은 전각에는 전(殿)이 붙는다고 보시면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전각도 크고 화려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堂) 같은 경우는, 전(殿)처럼 격이 높은 전각에 사용했고, 대표적으로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자선당, 후궁들이 지냈던 함화당 집경당 등이 있는데요. 왕, 왕비, 대비 등이 당(堂)이 붙은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건물의 주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합(閤)과 각(閣), 제(齊), 헌(軒), 루(樓), 정(亭) 순서대로 보시면 되는데요. 루(樓) 같은 경우는 경회루를 생각하시면 되고, 정(亭)은 정자의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 월대가 있는 전각들도 급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월대에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고요.
세 번째, 잡상의 수가 많을수록 그만큼 중요도가 높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건물의 규모, 그러니까 몇 칸의 건물인지를 통해 중요도를 가늠해 볼 수가 있죠.
이제는 어느 궁궐을 가셔도 자신감 있게 그 건물의 등급과 역할 등에 대해 짐작해 보실 수 있겠죠?
자, 그럼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수정전을 한 번 볼까요?
가까이서 보면, 규모가 꽤 크게 느껴지죠. 우리가 궁궐에 있는 건물의 규모를 측정할 때, 나무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보는데, 정면 10칸·측면 4칸으로 수정전은 40칸에 달합니다. 건물의 이름이 ‘전(殿)’으로 끝나고, 잘 보면 잡상도 5개나 있고요, 월대도 있네요. 그냥 지나칠만한 건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복궁은 세종대왕 시기에 좀 더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경복궁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왕도 세종대왕이고요. 다른 왕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창덕궁 등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정말 끝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업적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한글창제죠. 그리고 한글 하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집현전(集賢殿)입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해설에서도 가장 큰 대답이 나오는 때가 바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죠.
저도 여기 멈춰 서서 한참을 설명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세종대왕이 많이 아꼈다고 하죠. 집현전은 조선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세종대왕 시기의 싱크탱크라고 여겨지는데요. 집현전은 왕에게 국왕의 학문을 넓히고 세자를 교육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책도 빠르게 접할 수 있었고, 일정기간에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받았다고도 하죠. 특히 연구에 있어서는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죠. 알려진 바로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후, 그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 그리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등을 편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집현전의 학자들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데요. 관람객들에게 ‘집현전 학자 혹시 누구 아시나요?’라고 물으면 바로바로 대답이 나옵니다.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죠? 늦은 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직접 들어갔다고 합니다. 들어가 보니 집현전 학자였던 신숙주가 일하다가 엎드려 자고 있었죠. 세종대왕은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주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세종대왕 시기, 이렇게 많은 사랑과 지원을 받았던 집현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폐지되었다가 비슷한 다른 성격의 기관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수정전이 되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수정전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것입니다. 지금의 수정전은 건물만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담과 문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일제가 박람회를 한다는 이유로 전시장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그때 담과 문이 헐렸다고 합니다. 수정전은 고종 때 잠시 왕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기도 했습니다. 1966년에는 한국민속관으로 이용되기도 했고요.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갑오개혁은 갑오년에 단행된 개혁이었고, 여러 개혁 조치들이 나왔는데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국사시험에 늘 나왔던 단골문제가 바로 이 개혁조치들이었죠?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실 겁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과거제와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된 것, 그리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것 등이었고요. 갑오개혁은 근대사회, 평등 사회를 향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치열하게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후대에도 끊임없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카페만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수정전! 실제로는 큰 의미를 지닌 전각이라는 것을 여러분께서도 느끼셨을 텐데요.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수정전과 더불어 바로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여러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또 있는데요. 궁궐 속 푸른 잔디밭과 궐내각사에 대한 이야기로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