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비의 공간, 교태전을 둘러보고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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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올봄, 경복궁에서 가장 Hot한 곳- 왕비의 공간 교태전(1)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연 왕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왕비’라고 하면, 하는 일 없이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질투하거나 암투를 벌이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죠. 아주 오래전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유명했던 ‘여인천하’ 같은 드라마가 딱 그런 느낌일 겁니다. 물론 왕비도 사람이니 사랑도 하고 후궁들을 질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왕비라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할 일도 많고 책임도 많았죠. 우리가 왕비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선 왕비가 되는 과정부터 잠시 살펴볼까요?
왕실의 결혼은 당시 핫이슈였습니다. 나라의 경사였기 때문인데요. 그렇기에 절차도 복잡했다고 알려져 있죠. 우선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령(禁婚令)을 내려 왕세자의 결혼이 성사될 때까지 결혼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물론 첩의 자식과 천민, 과부의 딸 등은 제외였죠. 약 15~20세가 대상이었고, 금혼령이 내려지면, 각 지방의 관찰사들은 처녀단자를 바쳤다고 합니다. 처녀단자(處女單子)는 간택후보가 될 만한 처녀의 이름을 올리는 문서로 인적 사항을 기록한 자기소개서 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이름, 나이, 가족상황, 해당 가문의 내외사조, 사주 등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시대로 따지면, 결혼정보회사에 자신의 내력을 적어서 내는 것 같은 느낌이죠?
후보자가 결정되면 간택(揀擇)의 과정이 진행이 됩니다. 조선 왕실에서 혼인 후보자 중 적격자를 선정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고요. 초간택-재간택-삼간택의 순으로 이루어지죠. 왕비나 세자빈의 선택에서는 가문뿐 아니라 덕행도 중요했던 요소였다고 하네요. 삼간택의 과정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선발되면,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고 해서, 조선시대 국가의 ‘가례행사’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한 임시기구가 설치됩니다. 그리고 여러 절차를 거친 후, 왕비로 정해진 처녀는 별궁에서 일정기간 왕실의 예절을 배우는 등 소위 신부수업을 하면서 혼인을 준비하게 되는 거죠.
왕비는 실제로 매우 바빴습니다. 왕비는 대비나 대왕대비를 제외하고는 조선 여성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여자인데요. 왕비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자 공인(公人)이었습니다. 왕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왕실을 보살피고 관리하는 사람이면서 여성들만의 잔치를 관장하기도 했죠.
여기서 내명부란 왕의 후궁들과 수많은 궁녀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궁궐 안에 머물면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이고요. 외명부란 궁궐 밖에 살면서 궁궐을 드나드는 여성들, 즉 출가한 왕의 딸이나 종친의 처, 관원의 처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교사회에서 혼례라는 것, 그리고 왕비의 역할이라는 것은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낳는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왕비는 공식적으로는 양로연(養老宴)과 친잠례(親蠶禮)를 담당했습니다. 양로연은 조선시대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경로효친사상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의 의례로 국가에서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베풀던 잔치였고요. 친잠례는 조서시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시범을 보이는 의례였죠. 전통 농경사회에서 왕비는 친잠, 직접 누에를 치는 것을 통해서 길쌈하고 양잠하는 여성의 노동력을 권장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데요. 이렇게 왕비는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직접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거죠.
최근 매년 각 궁궐에서 열리는 ‘궁중문화축전’을 보시면, 이런 의례들을 재미있게 재현하고 있으니, 나중에 꼭 한 번 참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 주 전 열린 궁중문화축전 때 저는 해설을 듣는 관람객분들과 양로연에 잠시 참가했었는데,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실제로 궁궐의 웃어른을 모시고, 제사 같은 것들도 챙기고, 세자도 출산해야 하고, 내명부와 외명부 관리까지... 우리가 결혼해서 각종 기념일이나 경조사 챙기는 것들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왕비의 생활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짐작이 되시죠?
앞서 말씀드린 것이 왕비의 공식적인 역할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생활은 어땠을지도 궁금해지실 텐데요.
여러분, 조선시대 왕비들에게는 개인적인 재산이 있었을까요?
정답은 ‘있다’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여성들에게 재산상속권이 존재했는데요. 왕비 같은 경우도 친정에서 토지와 노비를 상속받아 입궐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어떤 왕비는 본인의 재산을 왕비로서 품위를 유지하는데 썼다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도 사용했지만, 국가에 불운이 닥쳤을 때에는 재산을 기꺼이 내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여성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관행이 없어지면서 친정으로부터 재산을 받기가 어려워지는데요. 대신 속궁(屬宮)이라고 하는, 각 전에 소속된 궁방을 일부 받아서 왕비의 재산으로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왕비는 혼례를 하고 궁궐에 들어온 후에 친정 부모님과는 어떻게 교류하고 인사를 드렸을까요?
왕비는 한 번 궁궐에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죠? 그랬기 때문에 편지를 통해서 교류를 했습니다. 문안 편지는 왕비가 한글로 직접 쓰기도 하고, 대필을 시키기도 했는데요. 혹시 ‘궁체 문화’라고 들어보셨나요? 궁궐에는 왕비나 대비를 대신해서 문안 편지를 쓰거나 한글 소설을 대필해서 쓸 때 궁녀들이 반듯한 모양의 글자를 썼는데 이와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왕비들이 썼던 편지들이 꽤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고궁박물관에서 명성황후가 쓴 문안편지 등이 전시되기도 했었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왕비들의 편지도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왕비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부분이 많았죠. 우리가 ‘태정태세문단세~’ 노래를 부르며 조선시대 왕의 순서와 업적은 외우면서도 그 시대에 어떤 왕비가 있었는지는 관심이 적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역할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왕비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마음으로 궁궐에서 일생을 보냈을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마음을 안고 교태전을 본다면, 교태전의 모습도 좀 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