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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역사를 마주하다

- 경복궁이 지나온 역사의 순간들

by Twinkle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자, 공부를 잘했던 여러분의 학창 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어요?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들께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과서나 참고서의 전체적인 목차나 흐름을 훑고 난 후에 세부적인 내용을 공부하라는 거죠. 숲과 나무를 적절하게 봐야 한다는 건데요. 그런데 갑자기 웬 공부 이야기냐고요?


먼저 궁궐이나 경복궁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난 후에 세세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경복궁의 매력이 좀 더 느껴지고 역사적인 부분들도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우선 경복궁이 지나온 역사의 순간들을 간단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1392년! 드디어 조선이 창건되었습니다. 그리고 1395년 9월 드디어 경복궁이 완공되죠.


경복궁은 궁궐건축의 원리에 맞게 짓게 되는데요. 중심이 되는 건물들이 하나의 축을 기준으로 일렬로 지어집니다. 그 축 위에 남쪽 광화문부터,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이 일렬로 배열되죠. 이 가운데에 배치된 건물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칭이 되는 건물들이 자리 잡게 됩니다. 제가 앞서 궁궐을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둘러봐야 한다면, 동선을 일직선으로 해서 다니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드렸었죠? 이게 그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은 조선의 상징이자 법궁(法宮), 정궁(正宮)으로 존재하지만,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조선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자 조선시대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죠? 조선이 세워진 지 200년 만에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은 불타게 되죠.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의 경복궁전도를 보면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돌과 나무만 남은 덩그러니 남은 모습... 적막감과 함께 공허함이 공존하는 느낌이랄까요... 마음 한편이 먹먹해집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왕이었던 선조가 피란을 갔다가 한양에 다시 돌아왔을 때 폐허가 된 경복궁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중건하면서 이후에 많은 왕들이 창덕궁에서 기거하게 되는데요. 그렇기에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큰 피해를 입은 경복궁이 270여 년 동안 왕이 살지 않는 빈 상태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1865년, 흥선대원군, 고종 시기에 경복궁 중건이 시작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중건을 감행하게 되는데요. 처음에 지었던 것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짓게 되죠.


<경복궁 영건일기>라는 조선시대의 사료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약 40개월(1865~1868년)에 걸쳐 진행된 경복궁 공사에 총 616,114명이 자원군으로 활동하였고, 매일 약 3천 명의 인부들이 품삯을 받고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난 공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중건 당시에 경복궁은 7000여 칸이 넘는 큰 규모였다고 하는데요. 경복궁 창건 당시와 비교하면, 약 10배 이상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고 새롭게 조선의 힘을 보여준다는 의미일 텐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에 다시 들어오면서 경복궁의 새로운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겁니다. 아직 복원 중인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우리가 현재 접하는 기본적인 틀, 그리고 경복궁의 모습은 이 시기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경복궁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경복궁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바로 그 사건!

1895년 10월(양력) 명성황후 암살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한 거죠. 을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요.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에 의해 살해된 안타깝고 끔찍한 사건이었죠. 경복궁 북쪽에 있는 건청궁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위협을 느끼면서 결국 거처를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1896년 2월 11일(양력) 고종은 비밀리에 경복궁을 떠나게 되죠.


고종은 어디로 향한 걸까요? 여러분이 고종이라면 어디로 가시겠어요?


고종이 선택한 곳은 바로 현재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이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를 ‘아라사(鵝羅斯)’라고 표현했기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왕이 옮겨갔다’라고 해서 우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르는데요. 아관파천 이후 1년여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겠죠? 그래서 많은 신하들이 고종에게 다시 궁궐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하죠.


결국 고종은 궁궐로 옮겨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고종이 돌아가기로 선택한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이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 고종은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의 국가를 선포하며 개혁을 추진하게 되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무(光武)’라는 고종의 연호도 이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고종은 조선을 황제의 나라를 칭하며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지만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경운궁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더 이상 왕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남게 되는 거죠.


사실 그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복궁은 많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조선청독부라는 건물까지 들어서면서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 아픔을 뒤로하고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죠.


경복궁은 조선왕조 시기를 거쳐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순간을 함께했고, 지금 역시도 역사를 마주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경복궁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듣고 나니, 경복궁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지지 않나요? 자,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광화문으로 함께 입장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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