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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물던 자리

그 바람 속에 잠시 쉬어가는 인연

by 나르샤

바람이 머물던 자리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아침이다.

서우는 작은 찻잔에 따뜻한 녹차를 따르며 창밖을 바라본다.

바람이 천천히 나뭇잎 사이를 흐르고,

그 사이로 햇빛이 부서진다.

그런 순간엔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날도 그런 아침이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시간이네."

정아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한 얼굴.

언제부터였을까,

정아와 서우는 늘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

창가 옆 테이블, 바람이 잘 들어오는 자리.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차를 마시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디로 가는데?"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

"어디든, 바람이 가는 곳으로."

그 말은 꼭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문장 같았다. 바람이 가는 곳. 늘 곁에 있는 듯하면서도,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곳.

서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을 조용히 음미하고 싶었다.

정아와 서우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종종 서우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온다.

찻잔 위로 햇살에 비친 물비늘이 작은 물결이 일었다가 이내 잔잔해진다.


정아가 서우를 지긋이 바라본다.

"잘 지내야 해."

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웃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억해 두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그녀의 흔적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서우는 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그녀가 마시던 찻잔도 그러했다.

서우는 문득 깨달았다.

지난 세월 속의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는 언제나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바람 속에서 잠시 쉬어가는 인연이었다는 것을.


창밖을 보니 하늘이 맑았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본 하늘처럼 투명하고 깨끗했다.

서우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머물던 자리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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