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 항아리 시리즈 1
바다로 나간 어부는 자리를 잡고 조심스레 그물을 던졌다. 어제도 던졌던 그 자리다. 하지만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여전히 빈 그물이다. 어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얘들아, 물고기들아! 나도 좀 먹고살자. 너희들이 그렇게 꼭꼭 숨어 있으면 난 빈 배로 돌아가야 하잖아. 제발, 나 좀 도와줘.”
그러자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을 돕는 건 우리 목숨을 바치는 건데요. 우리 목숨과 당신 목숨을 바꾸자는 것이네요?”
“그런가? 음! 맞는 말이네.”
어부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잡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하지만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너희를 잡으며 살아왔거든.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있잖아. 우리도 여전히 있고. 내가 적당히만 잡을게. 적당히. 알았지? 미안하다.”
어부는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그물을 던졌다. 이번에는 그물이 제법 무겁게 느껴졌다.
“이거 뭐지? 제법인데?”
어부는 서둘러 그물을 걷어 올렸다. 그물에는 큼지막한 항아리가 걸려 있었다.
“에이, 재수 없어. 웬 항아리.”
기분이 나빠진 어부는 항아리를 바다에 버리려다 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항아리 안에는 펄만 잔뜩 들어 있을 뿐이었다.
“에고!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옛날이야기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한 항아리가 있더구먼. 펄 만 가득하구나.”
그래도 어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빈 배에 빈 항아리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뭐예요? 고기는 안 잡아 오고.”
아내는 심드렁했다. 오늘도 빈손이기 때문이다.
“다른 집은 그물이 터지게 잡아 온다는데. 우리 집은 빈손이네. 그리고 이딴 항아리가 뭐야?”
화가 난 아내는 항아리를 마당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았다. 어부는 좀 속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웬 항아리?”
학교 갔다 돌아온 둘째가 마당 구석에 놓여 있는 항아리를 보고 물었다.
“몰라! 고기를 잡으랬더니 항아리를 잡았단다.”
“이거 혹시 골동품 아냐?”
“골동품? 그냥 항아리야. 장독대에 있는 거랑 똑같아.”
둘째는 항아리를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우거진 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웬 항아리?”
이번에 첫째가 들어오며 물었다.
“몰라! 고기를 잡으랬더니 항아리를 잡았단다.”
“바닷속에서 나온 거면, 이거 지니 항아리 아냐?”
“그게 뭔데?”
“문지르면 나와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 지니.”
“어이구. 그냥 항아리다. 장 담그는 항아리.”
첫째는 항아리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풀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항아리 소동이 지나갔다. 항아리는 값나가는 골동품도 아니었고 마술도 부릴 줄도 몰랐다. 그냥 평범한 항아리였다. 항아리는 마당 구석 풀 속에 깊숙이 치워져 눈에 띄지도 않았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추운 겨울이 되었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었다. 봄바람에는 바닷가 특유의 짜고 비릿한 냄새가 들어 있었다. 겨울을 넘긴 푸른 식물들이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여러 해가 지났다. 어느덧 늙어버린 어부는 더는 배를 탈 수 없었다.
“난 이제 어부가 아니야.”
마당 구석에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항아리도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눈이 쌓이다가 다시 햇살을 맞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항아리 속에 흙이 쌓였고 어느 해부턴가 이름 모를 들풀이 수북이 솟아났다. 그리고 들풀들은 작고 앙증맞은 꽃들을 내밀었다. 바람이 살랑이자 작은 꽃들도 살랑댔다.
하루는 늙은 어부가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마당에서 졸고 있었다. 벌과 나비들이 항아리를 열심히 들락거렸다.
“저게 뭐지?”
갑자기 늙은 어부의 눈에 항아리가 띄었다.
“아 항아리!”
그 언젠가 까마득한 시절, 바다에 그물을 던지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넘실대는 파도, 펄쩍거리는 물고기, 하늘을 유유히 나는 갈매기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풍경이 하나가 되어 항아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람이 일자 꽃들이 출렁였다. 꽃 무리가 하늘거리자 파도 소리가 났다. 살짝 비린내를 머금은 냄새도 풍겼다. 조는지 깨어 있는지 늙은 어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