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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의 비밀

동화 : 항아리 시리즈 2

by 인산

우리 집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다. 아버지는 항아리를 열심히 채운다. 항아리 속에는 쌀, 보리, 콩, 감자 등 먹을 것이 가득하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가지로 쌀을 푸고 감자를 푸며 항아리를 열심히 비운다. 가득했던 항아리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비어있는 항아리를 보며 어머니는 한숨을 쉰다. 그때 밖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자루를 들고 오셔서 항아리에 붓는다. 텅 비었던 항아리는 다시 꽉 찬다.


‘항아리는 비어있으라고 있는 거야? 채우라고 있는 거야?’ 곰곰이 생각하다 숲 속에 간다. 항아리에 그려있던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오솔길을 따라가니 나비들이 춤추고 저만치 사슴들도 풀을 뜯는다. 졸졸졸 시냇물 소리도 들린다. 한참을 걷자니 하얀 옷을 입은 노인 둘이 바둑을 둔다. 아이는 할아버지들이 무엇을 하나 가만히 지켜본다.


“넌 누구냐?”


한 노인이 묻는다. 아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다. 노인이 다시 묻는다.


“항아리 때문에 온 거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는 말이다. 채우기도 하고 비우기도 하는 거야. 채워야 비울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지.”

‘그게 무슨 말이지?’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통 이해할 수 없다. 흰 노인들이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 아이는 크게 소리친다.

“할아버지! 항아리 말인데요.”


어머니가 나를 깨운다.

“꿈꿨어?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


잠에서 깬 나는 윗목에 있는 요강을 쳐다본다. 일어나 만져본다. 반질거리는 요강이 손바닥에 닿는다.

“어머니! 항아리는 채우는 거예요? 비우는 거예요?”

“얘는 참! 항아리는 담는 거니까 채우는 거지. 채운 것을 조금씩 꺼내 먹으니까 비우는 것이기도 하고.”

‘뭐야? 채우면 채우고 비우면 비우는 거지. 어른들이란... 참나!’


그렇게 해서 어린 시절의 항아리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여 아이도 둘이나 된다. 조그만 아파트도 장만하였다. 별로 어긋남 없이 비슷비슷한 모습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일 톤 트럭이 서 있고 항아리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길거리의 항아리 장수였다. 나는 갑자기 퍽하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항아리!’


오래전에 잊었던 항아리가 문득 떠올랐다.

‘맞아! 항아리! 나도 아버지처럼 항아리를 채우기 위해 일하는 거야.’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통닭을 사고 캔맥주도 샀다.


“탁!”


맥주 캔 따는 소리가 상쾌했다. 한 모금 죽 들이키는데 또 항아리가 생각났다.

“나는 채워있던 캔을 비우는 중이구나. 비워진 캔은 재활용되어 다시 채워지겠지.”


식구들과 통닭을 먹으며 생각했다.


‘지금 비어있는 배를 채우는 거네. 항아리가 내 배잖아.’

“여보,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냐, 아무 일 없었어. 비움과 채움을 생각하는 중이야?”

“뭐? 뭐라고?”


알아듣지 못한 아내가 재차 물었지만, 그냥 피식 웃었다. 이제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얘기했던 항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항아리는 내 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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