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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속 미끼

동화 : 항아리 시리즈 3

by 인산

장독대의 거대한 항아리 속은 나의 해방 공간이자 가장 편안한 은신처였다. 틈만 나면 나는 그곳에 스며 들어갔다.


마당 한쪽에 늘어선 항아리에는 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따금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항아리도 있었다. 줄 선 항아리는 보기에 좋았다. 엄마는 항아리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했다. 장을 담그면 숨구멍을 통해 공기와 만난다고도 했다.


그 숨구멍이 있는 항아리는 나의 안식처였다. 화가 나거나, 우울하거나, 슬플 때, 혹은 나쁜 생각이 들 때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마음이 아늑하게 진정되었다. 숨구멍 덕택일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항아리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시작은 옷장이었다. 옷장 문을 닫으면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조이는 듯한 아늑함이 좋았다. 하지만 옷 냄새가 신경을 거슬렀고, 옷가지들이 거추장스러웠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욕조 안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문제는 위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오줌 싸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가 귀를 성가시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낸 곳이 항아리였다. 약간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항아리를 눕혀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항아리가 덜컹거렸다. 그르렁거리며 움직이는 항아리 속에서 마치 우주선을 탄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움직이던 항아리가 조용히 멈춰 섰다. 나는 반대로 움직여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항아리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항아리의 딱딱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있었지만 졸리면서 몸이 가라앉았다. 항아리 속에서 곧 잠이 들었다.


깊은 어둠이 밀려왔다. 단지 어둠일 뿐이었다. 빛이 다가오면 물러나야 할 어둠도 아니고, 빛의 승리를 위해 패배할 어둠도 아니었다. 항아리 속 어둠은 빛과는 무관한 어둠이었다.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처럼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나를 기꺼이 안아주는 어둠이었다. 포근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쓴 것 같았다. 잠이 깨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굳이 눈을 감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더욱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깊은 어둠을 뚫고 몸이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무중력을 유영하듯, 물속을 수영하는 사람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였다. 다리가 뭔가에 닿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기대는 무산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하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떨어지는 움직임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항아리는 드넓은 우주를 달리는 우주선이 되었다. 수많은 별이 소금처럼 반짝였다. 곰 별자리, 북두칠성 등이 스쳐 갔다. 그들에게 손짓하자 별들도 반짝이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책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원숭이를 잡는 비법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주둥이가 작은 항아리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넣어둔다. 원숭이는 냉큼 항아리 속 바나나를 움켜쥔다. 그러나 주둥이가 작아 손이 편 상태에서는 들어갔지만, 바나나를 쥔 손은 항아리를 빠져나올 수 없다. 결국 손을 놓지 못하는 원숭이는 사람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 이야기는 “바나나를 놓아 버리면 살지만 쥐고 있으면 죽는다는 의미, 욕심을 버리면 살고 욕심을 부리면 죽는다는 의미”라고 쓰여 있었다. 바나나가 들어 있는 주둥이가 작은 항아리는 결국 원숭이의 무덤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항아리 안에 있는 자신을, 그리고 항아리 속 미끼가 된 바나나를 떠올렸다. ‘나도 항아리 속 미끼구나.’ 나는 깨달았다. 미끼는 무엇인가를 잡기 위한 것이다. 낚시 미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고, 덫 미끼는 짐승을 잡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잡기 위한 미끼인가?’ 항아리 속 미끼인 나는 온전히 자신을 잡기 위한 미끼였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지금 항아리 속에 있는지 알기 위한 미끼인 것이다. 나는 그 깨달음을 품고 기꺼이 미끼가 되어 항아리 속에 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날 밤, 드디어 커다란 무엇인가가 구렁이 담 넘듯 항아리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드디어 미끼에 걸려들었구나.’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기꺼이 미끼가 되었다. 그것이 나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항아리 입구가 너무 컸나 보다. 미끼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밖으로 끄집어내 졌다. ‘이제 그것이 나를 먹어치우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실행된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설레기까지 하였다. 다만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사용된 미끼는 더 이상 항아리 미끼로 쓰이지 않으리라.


이제 나는 더는 항아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결정했다. ‘항아리 속에 미끼를 넣고 바다에 던지자.’ 바다는 평온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은 항아리는 마침내 원래 있던 곳으로 던져졌다. 그 안에는 새로운 미끼가 담겨 있었다. 그 미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끝없이 나 자신을 잡기 위한 미끼였다. 멀리서 파도와 갈매기가 넘실대는 소리가 아득히 항아리를 감싸 안았다. 한 동안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던 항아리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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