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리와 땅이

동시

by 인산

하느리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 아래 언제나 다소곳한 땅이가 참 예뻐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리는 땅이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땅이 곁에 다가가면 땅이가 어디론가 가버릴지 모릅니다.


멀리서 하느리는 땅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정성을 다합니다.

땅이가 웃을 수만 있다면 하느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땅이가 좋아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불러다 그림을 그립니다.

땅에 사는 동물들이 넘쳐 납니다.

꽃도 그립니다.

거대한 해적선이 바다를 항해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림책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성도 나타납니다.

구름만 있으면 요술을 부리듯 하느리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땅이는 가끔 몸단장을 합니다.

봄에는 연초록 옷을 입고 노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로 머리를 가꿉니다.

갓난 아이 살처럼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여름에는 진한 푸르름이 시원해 보입니다.

조용히 불러대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습니다.

가을에는 색동옷을 입습니다.

화려한 외출복이 눈부십니다.

겨울에는 하얀 옷을 입고 창백한 입김을 불어냅니다.

털모자도 목도리도 장갑도 하얗습니다.


예쁜 땅이 모습에 하느리는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갑자기 땅이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느리가 입을 벌리자 바람이 붑니다.

땅이 머리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그러자 붉은 기운이 도는 하얀 꽃잎이 땅이 원피스에 우수수 떨어집니다.

땅이는 말없이 머리를 매만집니다.


구름 그림이 심심해지면 하느리는 해님 구슬을 꺼냅니다.

밝은 빛이 나는 해님 구슬은 땅이를 환하게 비춰줍니다.

눈이 부신지 땅이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잠깐 고개를 듭니다.

하느리 볼이 빨개졌습니다.

해님 구슬이 서산에 걸리자 붉은 노을이 땅이 옷자락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냅니다.

이번에는 달님 구슬을 꺼냅니다.

달님 구슬은 모양이 매일 매일 변합니다.

달님을 벗 삼아 땅이는 새근새근 잠을 잡니다.

하느리는 주머니에서 꽃가루를 꺼내 훠이 던집니다.

사방에 흩어진 꽃가루들이 눈을 깜빡이며 자장가를 불러 줍니다.


하느리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땅이는 말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조용히 있습니다.

하느리 가슴이 조금씩 아파 옵니다.

땅이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땅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하느리의 넓고 푸른 가슴에 꽃이 필턴데.

하느리 눈에 반짝 눈물이 고입니다.

한 방울 뚝 떨어집니다.

땅이 위에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keyword
이전 01화헤어짐 그리고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