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 움트는 봄을 지나,
생명의 활기가 절정에 달하는 여름이 떠나고,
모든 것이 저물어가는 가을이 왔다.
영원처럼 타오르던 태양 빛이 수그러들고
숲은 찬란한 초록빛을 잃어간다.
대신 그윽한 붉은빛을 얻었다 생각될 때, 그마저도 툭, 잃을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그 잃어가는 것들을 가슴에 붙잡아 두며 공허하게 깊어가는 가을은
어른의 날들과 닮았다.
18살 가을엔 교정에 흩날리던 낙엽을 주워 책갈피를 만들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향해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까르르’ 웃던 천진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벌레 먹지 않은 예쁜 낙엽을 고르던 진지한 눈빛이 눈에 선하다.
그땐 붉은 낙엽이 손에 쥐어지는 기쁨으로 마음이 충만했다.
앞으로의 삶에서 얻을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던,
봄날 같은 가을이었다.
며칠 전, 몇몇 이파리가 붉게 물들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곧 나무 전체가 온통 붉게 물들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파리들은 비틀리고 말라 모두 떨어질 것이다.
찬란했던 여름을 모두 털어낸 가지만이 앙상히 남아 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릴 것이다.
아직은 녹색 잎이 가득한 나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벌써 시린 겨울에 닿았다.
그만, 마음이 공허해졌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얻을 것에 설레기보다 잃을 것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얻은 것에 충만해지기보다 잃은 것에 서글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가을이 되면 지나간 시간에 자꾸만 눈을 돌리게 된다.
여름 바다처럼 싱그러웠던 청춘을 돌아보고,
겁 없이 사랑에 뛰어들던 열정을 떠올리고,
이별의 아픔마저 역동적으로 겪어내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꾸던 당돌한 마음을 돌이켜 보면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어른이 된 나는 물들지도 않은 가을을 바라보며 왜 오지도 않은 겨울을 그리고 있을까.
왜 아직 잃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며 겁을 먹고 있을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변화시킨 걸까.
가을바람은 유독 시리게 허파를 찌르고
잔잔한 가을 노래는 유난히 심장을 파고든다.
가을 하늘의 노을은 유독 애달프고,
찰나의 붉은 숲은 유난히도 황홀하다.
잃은 것이 남긴 아픔을 알기에,
잃을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어른의 가을은, 그러나 더욱 소중해진 계절이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기에,
어른이 된 나는 이 가을의 모든 순간을
온 마음을 다해 아껴줄 것이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이 계절이 떠나갈 때,
어른스럽게 이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