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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고 싶거든 커피를 읽어보세요

by 은도

지금처럼 카페가 즐비하지 않았던, 그리고 커피는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던 나의 10대 시절, 내게 커피는 캔커피 ‘레*비’, 달달한 어른의 맛이었다. 달달할 줄 알았던 어른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20살이 되고 아메리카노를 마셔보았지만 내 입에는 너무 쓰고 텁텁했다. 대신 나는 달콤한 캐러멜 마끼아또를 즐겨 마셨다. 어른이 되면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달콤한 시럽이 띄워진 우유 거품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하지만 달콤한 커피는 살을 찌우는 능력이 탁월했으므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쓰기만 했던 것이 익숙해지니 고소한 것도 같고, 텁텁하게 느껴지던 것이 오히려 깔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쓰디쓰던 맛을 즐기게 되니 어른이 된 것도 같다,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커피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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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를 하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와 다정한 담소가 오가는 향긋한 공간에 속해 있고 싶었달까. 그곳에서 나는 핸드드립으로 내린 스페셜티 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판매하는 20가지가 넘는 원두들은 제각기 다른 향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커피는 은은한 꽃 향 뒤 상큼한 레몬 향이 번지고, 어떤 커피는 열대과일의 산미와 밀크 초콜릿 같은 부드러운 단맛이 우아한 조화를 이루는가 하면, 어떤 커피는 견과류의 편안한 고소함 위에 오렌지빛 산미가 한 방울 떨어진 듯한 향미를 낸다.


하지만 커피의 맛을 기껏해야 ‘고소함’과 ‘산미’로만 양분하여 느끼던 내게 꽃이니 열대과일이니 견과류니 하는 단어들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아무리 마시고 그 향미를 혀 안에서 찾으려 노력해 보아도 도무지 찾아지지 않았다. 복잡하고 난해한 커피 향미의 세계, 나는 그 혼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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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바리스타는 내게 직접 내린 커피를 건네며 묻곤 했다. “어떤 향이 느껴져요? 어려우면 색깔로 표현해 보세요.” 향도 모르겠는데 색깔이라니... 아마도 그때 내 표정은 커피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음... 노란색...? 아니, 주황색...?”이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한 뒤 답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바리스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으음~”하며 끄덕인 뒤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스스로 답을 구해내길 바라는 마음일 거라고 나는 해석했다.


향미를 분별하기 어려워하는 내게 그는 이런 조언을 했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향미를 느껴보고 어울리는 색깔을 떠올려 보세요. 처음에는 잘 모르겠어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알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커피를 마실 때마다 한 모금을 머금고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입을 우물우물하며 향을 뜯어보기도 하고, 코로 숨을 내쉬며 숨에 섞인 향을 느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꽃, 딸기, 오렌지, 레몬, 복숭아, 설탕, 초콜릿, 견과류...... 온갖 향미들을 떠올리며 미각과 후각에서 느껴지는 향미와 대조해 본다. 처음에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으나 어느 순간, 그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커피를 조금 더 깊게 즐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한 모금을 머금고 음미하고 뜯어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그 순간, 커피의 향미는 내 시간을, 내 일상을 낭만적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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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커피의 향미를 읽어내는 일, 사람을 이해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 일은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해서 때로는 불가해하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우리는 종종 깊게 이해하기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매력적인 일이다. 커피 향만큼이나 향긋한 일이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도 좋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향미를 읽어내려 섬세하게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깊어질 테니. 그럴수록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은 더 낭만적인 시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사랑을 하고 싶거든 이제부터 커피의 향미를 읽어내는 연습을 해 보자. 그 섬세해진 감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정하게 읽어보자. 그 섬세함과 다정함이 당신의 사랑을 더욱 향긋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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