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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방과 달빛

by 은도

가을에는 유독 낭만이 깊어진다. 떨어지는 낙엽도, 찬 바람 부는 날씨도, 높은 하늘도, 깊은 달빛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감수성이 짙어지고 사유의 시간도 길어진다. 그 사유의 끝에 닿는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진부해도 벗어날 수 없고, 어려워도 놓을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난제. 우수에 찬 가을 달빛 아래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내게 사랑은 뜨겁고 무모한 것이었다. 싸우고 할퀴고 물고 뜯고 지지고 볶더라도 서로를 껴안고 기꺼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것이었다. 그런 지난한 과정에 서로를 내던져 결국에는 상대의 결핍마저 품어내는,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004] 노을.jpg 제주시 금악리


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기에, 사랑을 시작하고 관계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단점과 못난 내면, 결핍까지 몽땅 보여주고 피 터지게 싸워서라도 나를 이해해 주길, 더 깊은 사랑으로 품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대는 나를 견뎌주지 않았고, 품어주지 않았다. 내 장점만 사랑해 주었고, 나와의 관계를 너무나 쉽게 포기해 버렸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꿈꾸던 사랑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한 지 불과 1년 후, 남편이었던 그는 사랑에 대한 내 믿음과 꿈을 남김없이 박살 내고 나를 떠났다.


그 후, 나는 반항하듯 사랑에 대한 비관론자로 돌아섰다. ‘사랑은 몽땅 다 거짓이다, 허구다, 위선이다, 상대를 온전히 품는 진정한 사랑이란 결코 존재할 리 없다’를 외치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 속지 않겠다’ 다짐했다.


내 외로운 외침이 들리지 않는 듯 세상은 여전히 곳곳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그 물기 어린 목소리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다시 사랑을 믿어보라고, 사랑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쓰며 다시 사랑할 준비를 해 보라고.


[004] 달1.jpg 제주시 해안동


달빛이 닿지 않던 그믐의 밤, 불현듯 무너진 내 마음에 달빛처럼 잔잔한 위로를 건넨 이가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건넨 그 위로에 담긴 온기가 내 마음에 번지듯 스몄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태양처럼 뜨겁고 불나방처럼 무모한 것만이 사랑을 이루는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내가 꿈꾸는 사랑은 달빛처럼 잔잔하고 조심스럽게, 달과 나 사이 거리만큼 떨어져 서로를 조용히 비추는 방법으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게 사랑은 여전히 ‘상대의 결핍마저 결국 품어내는 것’이다.

불나방 같은 사랑이든 달빛 같은 사랑이든 나는 여전히 사랑을 생각한다.

그림자마저 아름다운 가을 달빛 아래 나는 다시 사랑을 꿈꾼다.


[004] 달2.jpg 제주시 해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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