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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고요한 나의 집

by 은도

한라산에 눈이 소복이 쌓인 12월 초, 나는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직은 온화한 날씨의 제주를 떠나 육지에 도착하자, 영하권의 차디찬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겨울이 온몸을 덮쳤다.


그날 저녁, 수도권에 함박눈이 내렸다. 나는 모임 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열차는 지연됐고 지하철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쌓여갔다. 이미 만원인 열차에 꾸역꾸역 올라타자, 잊고 있던 감각이 번뜩 떠올랐다. 눈 오는 날, 퇴근 시간 지하철. 함부로 흔들리는 몸뚱이를 지탱하려 다리 근육에 바짝 힘을 주던 뻐근한 감각, 앞사람 등판에 파묻혀 질식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비틀던 고통스러운 감각, 심장이 터질 듯 조여오던 갑갑함. 차창에는 익숙한, 그러나 잊고 있던 얼굴이 비쳐 있었다. 공허한 눈빛, 일그러진 이마, 굳게 다문 입술. 참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027] 비행기에서 본 한라산.jpg


열차가 가다, 서다 반복한 탓에 예정보다 3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눈 녹듯 얼굴 근육이 풀리고 목소리 톤이 절로 높아졌다. 근 1년 만에 성사된 모임이지만, 어릴 적 함께 쌓은 추억의 힘은 대단하다.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어색함 하나 없이 곧장 소란스러운 수다가 이어졌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고 스무 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유치해졌다. 그렇게 추억팔이를 하며 대화가 무르익으니, 이내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 친구가 신혼생활의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곧이어 결혼 9년 차에 접어든 친구가 부부 사이에 대한 고민으로 맞받아였다. 육아 이야기, 결혼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직장 생활의 고단함까지 오면 대화는 여지없이 이 주제에 도달한다. 집과 투자. 최근 들어 집을 너무 사고 싶다던 친구가 은행원 친구에게 물었다.

“요즘 대출 금리 얼마나 해?”

“보통 4%대 나와.”

“와, 4%가 넘는구나. 요새 대출은 잘 나와?”

“지금은 연말이라 잘 안 나오고, 연초 되면 좀 풀릴 수 있어.”


친구는 무지막지한 집값과 높은 대출 금리에도 불구하고 집을 사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내가 요즘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를 좀 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서두는 ‘부동산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므로 집을 사야 한다’는 친구의 주장에 신뢰를 더했다. 그 이야기를 멀뚱멀뚱 듣다 보니 제주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금 당장 사야만 할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길거리에 나앉을 것 같은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불안과 두려움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이성은 점차 흐릿해지고, 잠시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친구들에게 재테크 방법을 전수받고 있었다. 다시 의식이 흐릿해졌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는 투자에 대한 지식을 주입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대화의 결말은 언제나 허무하고 아이러니하다. 결국 로또, 불로소득으로 끝나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술 때문인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찬 공기가 코를 통해 온몸에 스미는데 정신은 점점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027] 비행기에서 본 구름.jpg


다음날, 육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온화한 날씨에 움츠렸던 몸이 풀렸다. 어지럽던 머리에 고요가 찾아왔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귤피차를 우렸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을 했다. 이 겨울에 대해, 한라산에 내린 눈에 대해, 육지에서 맞은 함박눈에 대해. 그리고 또 생각했다. 육지에서 만난 사람들, 즐거웠던 만남, 그 속에서 들뜬, 그러나 조금은 이질적이었던 나에 대해.


제주의 자연을 바라보고, 내 안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글로 정리하는 내 일상에 이렇게 한 번씩 현실의 고민이 덮쳐올 때면, 나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든다. 휴양지 해변에서 일광욕하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출근, 그것도 자칫하면 지각이라는 현실 앞에 놓인 기분이랄까. 그럴 때면 단꿈에 젖어 지각인 줄도 모르고 침 흘리며 자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철없고 대책 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제주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집이니, 투자니, 결혼이니 하는 복잡하고 숨 막히는 그런 건 다 모르겠고, 그냥 조금 더 오래 단꿈에 머무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나 좋을 대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0평짜리 직육면체 집 말고 지금 이 드넓은 고요가 내 집이라고. 이 고요한 집에서 갖는 온전한 내 시간이야말로 내게는 그 어떤 투자 상품보다 수익률 좋은 투자라고, 어쩌면 로또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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