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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탈북 10화

# 10 감옥

by 한성태

2002년이 되었다.

매해 봄이면 산불이 나 벌거숭이 산을 태우고 또 태우고. 불이 나면 사람들은 그 산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


그 해는 유난히 산에 불이 많이 났다. 불이 나면 보안원, 산림보안원들이 집집마다 사람들을 수색하여 산불 끄기에 내몬다. 먹지 못해 힘도 없는 사람들은 억지로 산으로 끌려가 숨어 있다가 불이 잠잠해지면 집에 온다. 다음날 불이 번지면 또 동원이다.




지긋지긋한 산불철이 지나 나는 미역 한 배낭을 지고 양강도 혜산으로 장사를 떠났다.

북한에서는 국경 40km 밖에 사는 사람이 국경 쪽으로 가려면 특별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통행증을 받으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에 나는 통행증 없이 길을 떠났고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혜산시 ‘위원’이라는 곳을 지나 보천’으로 가던 중 보위부에 ‘불법 월경시도자‘ 통행증 없이 국경 40km 이내에 들어왔다고 해서 국경을 넘어가려는 불법월경시도자로 걸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보위부로 끌려가 온갖 구타로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죄목을 만들기 위한 심문을 매일 같이 받아야 했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장사하러 왔다.”

“왜 통행증이 없냐? 중국으로 가려고 한 게 아닌가?”


하루에도 몇 장씩의 조서를 쓰면서 ‘불법 월경’ 죄목을 자백하라고 압박받았다.

그렇게 해서 7일간 보위부 유치장에 있게 되었다.




그곳에는 중국에 갔다 온 사람, 나처럼 통행증이 없어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 20~30명이 갇혀있었다.


북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옥수수 1kg로 국수로 만들면 300g짜리 국수 3개가 나온다. 그런데 유치장 수용자 30명에게 먹일 식사로 국수 3 사리에 무시래기를 잔뜩 넣어 끓인 멀건 죽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 몰골은 다 뼈에 가죽을 씌워놓았다.


하루는 심문받으러 갔는데 왼손은 수갑으로 채워 보일러 철근에 묶어 놓고 오른손에 종이와 펜을 주고 책상에 앉아 조서를 쓰라고 했다.

조금 지나 어떤 놈이 하나 들어오더니 내 조사를 맡은 보위원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어보았다.


담당 보위원이

“중국에 가려고 하다가 잡혀 온 놈이다”

라고 답하니


“이놈은 우리 장군님을 배신하려는 자이니 죽어 마땅하다.”

고 하면서 구둣발과 주먹으로 나를 수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순간 온 얼굴에서 피가 나와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러자 바닥의 피를 닦으라고 했다. 왼손의 수갑도 풀어주지 않은 채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오른손으로 바닥의 피를 닦으려 하자 옷을 벗어 닦으란다. 수갑을 차서 상의는 벗기 어려우니 바지를 벗어 닦으라 한다.


나는 한 손으로 바지를 벗어 바닥에 흐른 피를 닦으며 “내가 청춘을 바쳐 지킨 나라가 이런 나라구나”하는 생각에 속으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7일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치고 안전부(경찰) 감옥으로 이송됐다.




안전부 감옥은 더욱 참혹했다. 감방이 10개 정도 있었는데 한 방에 20명씩 들어가 있었다. 수용자들은 하루 종일 머리 숙이고 앉아있어야 한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철창 밖으로 끌려 나가 몽둥이찜질을 받게 된다.


온몸에는 이가 기어 다니고 식사는 콩알 7알에 옥수수 30알 정도, 거기에 소금국을 부어준다.

감옥에서 식사 시간만은 감시가 없다. 그러니 힘이 약한 사람은 그나마 그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숟가락은 손잡이를 없애고 동그랗게 된 앞머리만 준다. 숟가락을 삼켜 자살한 사람이 많아서이다. 그만큼 감옥에서 힘이 약한 사람은 며칠 못 가 시체로 감옥 문을 나선다.


첫날 감방에 들어가니 방장이라고 하는 놈이 인사를 하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밖에서 죄를 지어 ’교화‘ 교도소에 갈 사람들이다. 적어도 5~6년 형을 선고받은 무서울 게 없는 조폭들인 경우가 많다.

내가 어리둥절해 쳐다봤더니


“야! 이 새끼야! 붉은 기를 날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의 뜻도 모르는 채 날아오는 주먹에 코피가 쏟아졌다.

영문도 없이 한 대 얻어맞으니 머리가 몽롱해졌다. ’붉은 기를 날린다‘ 하는 소리는 북한 깃발이 붉은색이니 피를 흘려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는 소리였다.


보위부에서 맞은 것도 억울한데 같은 수용자에게 맞아 피를 봤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특수부대에서 훈련받은 나인데….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몸을 날려 받았는지 그놈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음은 그 옆의 추종자들이 문제이다. 그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감옥에서 살아 나가기 힘들다.

체격이 좋은 놈 하나가 들어온다. 순간 몸을 피하며 급소를 쥐어박으니 그놈도 쓰러지고 다른 한 놈을 더 처리하고 나서야 감옥이 잠잠해졌다.


감방 안이 소란스러우니 계호원(교도관)이 들어와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나는 이들이 먼저 나를 때렸기 때문에 나도 그랬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떠들지 말고 조용히 화해하라며 나가버린다.


그다음부터 나는 감방에서 갑질하던 놈들을 뒤에 꿇어앉히고 힘이 없어 괴롭힘 당하던 이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무척 고마워했다.




안전부 감옥에서 15일가량 있었고 이후 청진수용소로 이송이 됐다.

청진에는 수성구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고 남청진 라남구에 도 집결소(수용소)가 있다. 여기에는 탈북자, 탈북시도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에는 약 20평짜리 방이 2개 있어서 남자, 여자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의 방에 40명~60명까지 집어넣으니 그야말로 콩나물시루다.

여기도 갖가지 고문과 구타, 강제노역 등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집단 처벌이 가해지고, 처벌받은 집단은 잘못한 한 사람을 향해 폭행이 이루어진다.


그때는 가을이라 여자들은 농촌으로 나가 배추 캐기, 볏단 나르기 등을 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논에 들어가 하루 종일 볏단을 나르는 힘든 일이었다. 먹지 못해 앙상한 여자들은 논에서 쓰러지기 일쑤였으며 하루 종일 일하다 들어오면 그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남자들 한 개 조에 배치되어 ‘피치(아스팔트 포장하는 검은 액체)’를 가지러 청진제철소로 갔다. 피치는 수용소 난방에 사용되었다.

탱크를 실은 차를 타고 가서 무릎까지 빠지는 피치 통 안에 들어가 피치를 빠께스(양동이)에 퍼서 탱크로 날라 담는 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몸에 묻은 피치를 씻기 위한 석유도 가지고 왔다. 석유로 피부에 묻은 피치를 씻고 나면 햇볕에 피부가 타서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고 걸핏하면 매질이었다.




열다섯 명 정도의 남자들 다른 조는 구들돌 채석장에 갔다.

북한에서는 온돌을 놓을 때 넓적하고 얇은 돌을 온돌바닥에 깐다. 돌을 채취하는 채석장은 산 위에 있으니 돌들을 밑으로 내려보내려면 미끄러뜨려 가져와야 한다.

그때 갔던 사람 중 한 명은 돌에 맞아 죽고 다른 한 명은 다리가 절단되어 돌아왔다.


여름에 잡혀 온 사람들은 다 여름옷을 입고 있어 겨울이 되자 정말 추워 죽을 맛이다.

수용소에 입소하면 한두 달 후에 본인이 살았던 고장의 안전부에 연락한다. 거주지에서 안전원이 호송을 와야 자기가 살던 안전부로 이송이 되고 이송이 되어 다시 교도소에 갈 사람은 교도소에 가고, 풀려날 사람은 풀려나고, 단련대에 갈 사람은 단련대(강제노동교화소)로 간다.

그 사람들이 데리러 와야 하는데, 한두 달 미루어 오면 결국 대여섯 달 정도는 수용소에 있어야 한다.


겨울이 오자 허약자들만 수용소에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 50명 정도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자동차에 태워 수성 쪽 깊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겨울이 되니 보안원 간부들이 사용할 겨울 땔감을 만들기 위해서다.

여름 신발, 여름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 내리는 산에서 손을 호호 불며 3일간 나무를 하였다. 발이 빠지는 눈 속, 얼음이 떠다니는 개울을 지나 남녀 할 것 없이 채찍을 맞으며 나무를 끌어내리던 생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무에 맞아 발가락이 빠지고 갈비가 부러지고….


그때를 생각하니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허리에 권총을 차고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안전원들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해 6개월 정도 감옥에 있다가 풀려나왔다.

감옥 문을 나오는 순간 그 사회에 대한 실망과 저주가 차올라 가슴이 답답하였다.


16살에 부모 곁을 떠나 군대에 나가 당과 수령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나의 조국이 이렇게 썩고 썩었으니, 수령, 당, 조국도 다 위선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언 땅에 배를 붙이고 잠복 초소에서 밤을 지새웠던 하루하루의 나날들이 다 저주로운 날과 날이 되었으며, 내가 청춘을 바쳐 지킨 조국이 숱한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묻힌 땅이라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고 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땅 어느 곳곳 지금도 피고 지는 꽃이나 나무들은 그 땅을 너무나도 사랑한 영혼들의 피와 살을 먹고 있고 그 밑에 묻힌 수백만 명의 영혼을 담아 지금도 피고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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