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탈북 09화

# 9 총살

by 한성태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에 대한 통제가 심해지고 반동분자 처벌이 더욱 엄격해졌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3대 세습을 하다 보니 국민들에 대한 통치 대안은 공포정치였다. 누구와 술 한잔 먹었다가 다음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공개처형이 집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나처럼 추방되어 살던 동네사람 중에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아내와 4살, 6살 여자애들 두 명이 있었다.


이 사람이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옥수수밭에 들어가 옥수수 여덟 개를 훔쳐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당시 옥수수 여덟 개를 내면 술 한 병을 주었다.

술을 얼큰히 마시고 다시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훔쳐 몸에 숨기고 집으로 들어오니 아직 아내와 아이들이 퇴근 전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집에는 배가 고픈 군인이 무엇을 훔치려고 들어와 있었다. 군인은 주인이 들어오니 몰래 뒷방에 숨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 들어온 윤 씨는 술 마신 김에 벽에 걸린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에 대고 술주정을 했다.


“야! 이 새끼야! 정치를 제발 잘해. 우리 다 굶어 죽게 생겼다.”

뒷방에서 몰래 그 모습을 본 군인은 후다닥 문을 열고 도망갔다.

그 후 30분 지나 보위부의 지프차가 들이닥쳤다. 보위부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윤 씨를 마구 패더니 다리 관절을 꺾어 자루에 넣은 후 차에 실어 데리고 갔다.


그날 이후로 그 집에 사는 가족들은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고 윤 씨는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읍에 살던 또 한 친구가 있었다.

북한은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명절로 정하고 하루 이틀 휴식을 준 다음날 모여 <충성의 선서> 모임을 한다.


이 친구가 2월 16일, 17일을 쉬고 18일 출근하여 ‘선전실’로 선서 모임에 갔다.

선전실은 구들 난방 구조로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지만 불도 때지 않은 찬 콘크리트 바닥에 맨발로 올라가기 싫었던 친구는 맨 뒷줄에서 몰래 신발을 신고 올라섰다 한다.


줄지어 서서 입 모아 충성의 선서를 하고 찬양의 노래를 합창하던 중 신발은 신은 친구를 본 당의 세포비서가 “왜 동무는 신발을 신고 올라갔냐?”라고 물어봤고 친구는 “발이 시려서 그랬다”라고 대답했다가 그와 높은 언성이 오갔다고 한다. 당비서가 상급 당 기관에 이를 보고했고 바로 안전부까지 보고가 되었다.


즉시 보안원이 와서 안전부로 가자고 했고 친구는 “나는 잘못이 없다”라고 항의했지만 당장 체포령이 떨어지고 친구는 끌려갔다.

죄목은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며 충성 맹세를 하는 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였다.




2월 20일 아침, 어디에서 총살을 집행하니 모두 나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현장에 가보니 인민반 학교 학생들은 물론, 10살도 안된 어린아이들, 직장인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이틀 전에 끌려간 친구는 겨우 숨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입에는 자갈이 물려있었다.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느라 사형수에게 하는 짓이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이라는 것이 ‘장군님에 대한 불충실’ 등등 계속 듣던 이야기다. 그렇게 친구에 대한 재판이 끝이 났다.

보안원 3명이 나오더니 자동 보총에 총탄 3발씩을 장전하여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모인 관중을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당시는 자주 보던 일이라 마음은 무덤덤했지만, 그 정권을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지금도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는다.



사람은 사람이길


태어나 사랑과 믿음을 배우고

선함과 정직을 배우라

하느님은 이야기하였건만


하느님! 왜 저 땅을 버리시나요.

그 땅의 사람들은

시비구청(示鼻口聽, 눈코입귀) 다 막아놨어요.


인간이길 부정하고 사랑도 거부하고….

제발 저 땅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keyword
이전 08화# 8 황해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