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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탈북 08화

# 8 황해남도

by 한성태

2000년도에 접어들자 먹는 문제는 더 심각해지면서도 죽어가는 사람들 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다만 거리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차고 넘쳤다.

거리에 나서서 아파트를 바라보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창문이 없는 집들이 많다. 그 집들은 주인이 죽거나 떠나간 집이다.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지옥 같은 이 땅에도 봄은 찾아왔다.




산에 가면 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 보인다.

예전에 나무가 심겨 있던 곳은 거의 다 벌거숭이가 되었고 그 자리에는 다락논 같은 계단밭이 층층이 일구어져 있다.

나라에서 배급을 주지 못하니 누구나 할 것 없이 산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고, 땔감이 부족하니 산의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이용했다. 그러니 온 산과 들은 그야말로 벌거숭이로 변했다.


김일성, 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하며 살던 사람들, 배급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 중 80%는 다 죽었다. 그 땅에서 ‘노동당’을 믿고 살던 사람은 죽고 ‘장마당’을 의지한 사람들은 살았다. 그래서 북한에는 배급이 끊어진 2000년대 태어난 아이들을 장마당 세대라고 부른다.


남한에도 한 때 봄철 ‘보릿고개’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땅에서도 봄이 오면 참 힘들게들 살았다.

어린애들로부터 늙은이까지 산과 들을 헤매며 봄나물을 뜯어 생계를 이어갔다. 먹지 못한 어린 소녀들의 고사리손은 손이 퉁퉁 부어 갈라 터졌고, 입술은 바짝 말라 피 터진 얼굴을 하고 하루 종일 냉이, 달래 등 나물을 캐러 다닌다. 6월 말, 7월 초가 되어 감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한 많은 보릿고개’다.




나는 그해 황해남도로 소금 실으러 가는 트럭에 올라 황해남도에 사는 누나네로 식량을 사러 갔다.


기차로는 도착까지 며칠이 걸릴지 모르지만, 자동차로는 고장만 없으면 1~2일 내로 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장사하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지 않고 트럭을 타고 장사를 했다.

길가에 서서 담배나 돈을 흔들면 운전기사가 차를 멈춰 그것을 받고 사람을 태워 주었다. 사람을 태워 돈을 버니 운전기사들의 인기가 좋았다.


내가 탄 트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탔는지 편히 앉을자리도 없었다.

처음 누나네 집에 가는 마음은 식량을 좀 구해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풀어 있었다. ‘서해(남포) 갑문’을 거쳐 황해남도로 갔다.

큰누나와는 76년도에 서로가 헤어져 2000년도에 만났으니 약 24년 만의 상봉이었다.


내가 11살 때 큰 누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16살 나이에 남포에 있는 ‘기양뜨락또르(트랙터)’ 공장에 집단 배치가 되어 부모 옆을 떠났다. 그리고 공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시집을 갔다.

나 역시 5년 후인 16살에 군대 갔다가 2001년에 다시 만났으니 24년 만이다.

그새 훌쩍 성장한 동생을 보고 엉엉 울던 큰누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황해남도에서도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나라에 식량이 부족하여 배급이 중단되었지만 그래도 평양시 사람들에게는 배급을 주어야 하니 김정일이 평양시 구역별로 황해남도 시군을 정하여 평양시 배급을 맡겼다고 했다. 평양시 락랑구역은 은파군 담당, 만경대구역은 재령군 담당, 선교구역은 안악군 담당의 식이다.


그러니 농사꾼들이 농사를 지어놓고도 가을이 되면 평양시 안전원(경찰), 보위원 등등 권력 기관들이 나와서 지어놓은 식량을 다 가져간다. 계획된 식량이 모자라면 농민들 집을 수색해서 당장 내일 먹을 식량까지 빼앗아 갔다.


가을이 되면 황해남북도 전 지역에는 군과 군 사이의 식량 유통이 일체 금지되었다. 안악군에 사는 엄마가 재령군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켜 놓고 아픈 아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들고 가는 몇 kg의 식량도 강제로 몰수당하는 지경이었다.


온 나라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다.

그래도 나는 매형이 권력기관에서 일을 하니 식량을 좀 구해 가지고 다시 자동차를 타고 함경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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