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허상의 화폐

by 김민기

얼다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아이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펴고 섰다. "아빠 오늘은 회사 가지 마." 아이의 목소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병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도 어린이집 버스의 엔진소리에 못 들은 체하며 옷깃을 여미었다. "오늘은 일찍 올게." 내 입에서 나온 무기력한 위안에 아이의 눈동자가 금세 물기로 차오르는 듯했다.


오후 3시 회의실에서 종이로 접힌 작은 토끼 한 마리를 주머니 속에서 발견했다. 내 손가락에 달라붙은 커피얼룩을 머금고 구겨진 토끼는 회의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에 깔려 눌려 죽은 듯했다. 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부분은 오늘 중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팀장의 손가락이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두드릴 때마다, 나는 노트북 키보드 위에서 굳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회의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울고 있다는 문자가 도착했을 때, 유리창 밖은 이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종이 토끼 군대가 아이의 책상 위를 점령한 채로. 하나둘씩 접힌 그것들은 김첨지의 주머니 속 백동화(白銅貨)들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났다. 그는 동전으로 아내의 설렁탕을 계산했고, 나는 책상 위의 종이 토끼 무리를 세며 아이의 잃어버린 시간을 계산했다.


퇴근길 버스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니 내 눈 아래로 김첨지가 빗속에서 흘린 땀방울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빗물에 젖은 노면을 끌며 아내의 기침소리를 들었고, 나는 핸드폰에 비친 토끼 사진을 보며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의 그림자는 다른 시대의 거리 위에서 같은 정류장을 스쳐 지나가며 무거운 절뚝거림을 복사했다.


침대에는 웅크려 잠든 아이가 새로 접은 종이 토끼를 쥐고 있었다. 아이의 고요한 숨결은 내 가슴속을 두드리는 침묵의 망치소리였다. "내일은 꼭"이라는 약속은 공기 중에 산산이 흩어졌다. 유리창은 또다시 아침해를 반사하며 차갑게 방을 비추었고, 그 빛 아래서 종이 토끼는 고요히 흔들리며 우리를 갈라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