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겨울
동궁과 월지의 얼음이 해무리를 품은 채 빛의 각운(脚韻)을 만들 때, 나는 선덕여왕이 모란도를 해부했던 그날을 상상한다. 화폭 속 모란─자줏빛 화관을 쓴 채로도 나비 한 마리 없는 꽃. 여왕의 눈동자가 그림자 없는 태양처럼 그 결핍을 읽어냈을 때, 신하들은 시각과 후각 사이의 은유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비 없는 꽃은 향기 없는 몸짓이요." 그녀가 입가에 묻힌 말의 씨앗이 천년 후 내 발아래를 뿌리내렸다.
겨울의 경주는 모란도와 닮았다─꽃은 있되, 향기는 아직 회백색 침묵 속에 갇혀 있다. 첨성대의 별자리들이 꽃술로 옮겨질 운명을 기다리듯, 나는 봄의 화가를 기다린다. 석굴암 부처의 미소가 향기로 그려지는 그날을.
겨울밤, 황룡사의 기왓장같이 푸른 달빛으로 각인된 경주는 여전히 결핍을 풀지 못한 채 서 있다. 다보탑의 상륜(相輪)이 봄의 열쇠로 변할 때까지, 이곳은 한 편의 미완성 도화(圖畵)─꽃봉오리 대신 물음표를 매단─로 남을 것이다. 예술이 우아한 기만이라면 선덕여왕의 모란은 천년 전부터 봄을 유예한 속임수이었을 터.
신라인들은 씨앗을 심었을 것이다. 당나라 최고의 화가가 그린 허상을 흙속에 던지며. 하지만 꽃이 피어난 날 그들은 모란도의 공백을 향한 예찬을 알았을 것이다. 그림자 없는 빛, 나비 없는 꽃, 주석 없는 시. 모든 결여는 완전함을 위한 초대장이다.
내년 봄, 모란이 필 때 나는 두 개의 경주를 마주할 것이다. 하나는 꽃잎으로 쓰인 현재, 다른 하나는 눈꽃으로 새겨진 과거. 그 사이에서 선덕여왕의 예언은 나비가 되어 허공을 맴돌겠지. 나는 그 나비의 궤적을 따라 계절을 경계를 넘어선다. 하지만 향기 없는 꽃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향기 없는 꽃이 가장 격렬한 향기임을 알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