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삶과 인간적 슬픔
그것은 단지 쌀을 익히는 기계가 아니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 몸체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들, 뚜껑에서 치익─하고 터져 나오는 뜨거운 증기의 숨소리, 타이머 끝자락에서 울려 퍼지는 삐─하는 따뜻한 신호음.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가 호흡하는 리듬이었다. 나는 이 빛바랜 회백색 껍데기가 매일 아침 같은 각도로 주방 천장을 응시하는 모습을 마치 고대 신전의 수호상처럼 여겼다.
첫 봄날 그릇 속에서 부글부글 피어오르던 쌀알의 노래를 기억한다. 증기가 유리창을 얼룩지며 흘러내릴 때면, 그 안에서 미나리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환각을 보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너는 내게 시간을 주었지. 우윳빛 증기가 벽으로 스며들며 시계를 녹여버리곤 했다. 365일의 시간은 모두 네 안에서 축축하게 호화(糊化)되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네 심장이 멈췄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두드려도 벽콘센트를 돌려봐도 응답이 없었다. 서비스 센터의 젊은 직원은 손바닥으로 네 배꼽을 두드리며 "영혼이 고장 난 기계는 고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네 배속에서 주걱이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텅 빈 스테인리스 동굴 속을 헤매는 금속성 메아리. 그 소리가 내 귀 밑을 스칠 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토록 차가운 소리가 생명의 씨앗을 적시던 증기와 같은 근원이라는 것을.
나비 날개에 새긴 무늬를 현미경으로 해독하듯, 나는 네 표면에 서려있는 미세한 증기 자국들을 추적한다. 어느 것은 지난겨울의 눈물 자국이고, 어느 것은 끓다 남은 꿀물의 흔적이다. 네 뚜껑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던 그 뜨거운 숨이, 이제는 창백한 공기만을 토해낸다. 실패한 마법의 잔해.
상가에서 새 밥솥을 사 왔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가 내 눈을 찌른다. 이 생경한 기계는 절대 네가 내렸던 그 부드러운 강음계의 신호음을 내지 않을 거야. 네가 남긴 자리는 이제 기계적 정확성으로 채워진 빈 공간이다. 나는 유리창에 맺힌 증기로 네 얼굴을 그리다가, 어느새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다. 조(弔). 네게 올릴 한 자루의 바늘꽃.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의 껍데기를 빌려 이곳에 머문다. 밥솥이 되었다가 고철이 된 너도, 증기처럼 사라질 이 글씨도.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밥공기다. 단지 네가 남긴 그릇 한가득의 공기가, 지금도 내 코 끝을 스치는 방울방울의 향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