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에 대하여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쓰는 ‘환대’라는 말은
어디까지가 정의이고,
어디부터가 미화인가?
통상적으로 환대의 주체는 ‘환대하는 쪽’에 놓이고,
타자는 늘 받는 위치에 머문다.
이 구도는 거의 의심되지 않은 채 유지된다.
나는 한동안
누군가의 환대 안에서만 내가 나인 것처럼 살았다.
환대는 숨을 쉬게 했고,
경계를 낮추었으며,
잠시나마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그 환대를 유지하기 위해
말투를 조정하고 감정을 선별하고
생각을 순화하고 존재를 최적화한다.
그 시간은 점진적인 소멸의 시간이었다.
결과는 명확하다.
나는 점점 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래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환대의 힘”이라는 문장앞에서
물음표들이 따라왔다.
이 문장은 따뜻하지만,
삶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존재의 주체를 너무 쉽게 바깥으로 옮긴다.
환대가 기준이 됐던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진 것이 있다.
나는 환대의 결과가 되고,
정체성은 관계의 결과가 됐다.
그러나 환대가 없던 시간에도
나는 나로 존재했고,
선택했고, 견뎠다.
그 시간은 공백이 아니라
이미 삶이 작동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분명
환대가 나를 살게 해준 적은 있지만,
나를 대신 살아준 적은 없었다.
환대를 부정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머무름 없는 환대,
계속 이동하게 만드는 환대이다.
많은 곳에서 환대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환대가 나를 계속 옮겨 다니게 한다면
그 삶은 결국 아무것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환대가 기준이 되면,
받는 사람은 감사해야 하고 버텨야 하고 떠나기 어려워진다.
환대를 거부하는 행위는 곧 도덕적 결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환대는
사람을 머물게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사람은 사라지는데,
환대는 계속되는 상태.
환대가 기준이 되는 순간,
존재를 소모하는 구조로 변한다.
여기서 나는
타이탄의 도구들에 나오는
‘삶은 여인숙’이라는 비유를 가져온다.
여인숙은
쉬어갈 수 있는 곳이지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환대는 제공되지만,
삶의 방향은 손님이 스스로 정해야 한다.
여인숙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편안해질 수는 있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는 못한다.
내가 경험한 문제는
환대 자체가 아니었다.
환대가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환대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줄였고,
그 결과 나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를 요구하지 않는 애정을 만났을 때
나는 새 사람이 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애정은 나를 만들지 않았고,
나를 데려가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그 자리에 두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환대는 나를 나답게 만들지 않는다.
환대는 존재의 원인이 아니다.
환대의 역할은 훨씬 제한적이고,
그래서 더 정확하다.
환대는
내가 나를 잃지 않게 돕는 조건이다.
삶은 여인숙일 수 있다.
그러나 기준까지
여인숙에 둘 수는 없다.
머무름은 필요하지만,
정착은 스스로의 몫이다.
나에게 환대는
나를 데려가는 힘이 아니라,
내가 나로 떠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공연문의: 건율원(010-9056-9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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