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지 않은 삶을 바라보는 순간
보통 냄새는 기억을 불러온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의 향과 맛으로 잊고 있던 유년의 오후를 되찾았던 것처럼. 향기는 과거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고, 그 길은 대개 되돌아오는 법 없이 오래전에 닫혀 있었다.
그런데 어떤 냄새는 이상하게 미래로 향한다. 얼마 전 면세점 시향대 앞에서 우연히 맡은 향수 하나가 그랬다. 첫 번째 분사와 함께, 나는 갑자기 지금의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으로 빨려들어갔다. 햇살이 잘 드는 집, 고요한 오후, 커튼을 걷고 창을 여는 손. 그건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어떤 날의 장면이었고, 그 삶은 어쩐지 너무도 내 것 같았다.
처음이 아니었다. 여름 끝자락, 어딘가 마른 흙과 풀냄새가 섞인 공기를 들이킬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 냄새는 나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의 아침으로 데려갔다. 나는 분명히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고, 가방을 메고 전혀 낯선 건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도시는 낯설었지만, 나의 걸음은 익숙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아직 살지 않은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마치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꼈다.
도서관에서 맡은 오래된 책 냄새는 또 다른 나를 불러냈다. 어딘가 조용한 방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나, 두꺼운 안경을 쓰고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나. 그 상상 속의 나는 지금의 내가 포기한 어떤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그 삶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만족감이 스며있었다. 마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전공, 가지 않은 대학원, 만나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평행우주를 엿본 것 같았다.
이 모든 경험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순간 느꼈던 삶들이 모두 지금의 나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오히려 어색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고, 냄새가 보여준 그 장면들이야말로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냄새는 기억을 자극하는 감각 중 가장 원시적인 층에 닿아 있다. 그건 우리가 말로 표현하기 전에 먼저 인식하는, 감정과 직결된 감각이다. 편도체를 거쳐 의식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 버린다.
그래서일까. 냄새는 때때로 기억을 넘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의 장면들을 펼쳐 보인다. 그건 예측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그저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는 어떤 하루. 내가 되고 싶었던 누군가, 혹은 어쩌면 될 수 있었던 누군가의 시간.
돌아오는 길, 손목에 남은 향을 다시 맡아봤지만 처음의 장면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냄새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나는 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같은 냄새라도 맥락이 바뀌면 전혀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거나, 아예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는다. 도서관의 책 냄새도 더 이상 연구실의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그 삶들은 그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가능성이었다. 내가 직접 살아내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하지만 아주 잠깐, 그 향기를 통해 나는 내가 아직 살지 않은 하루를 먼저 살았다. 그리고 그 하루는, 이상하게도 가장 진짜 나 같았다.
냄새는 기억의 문을 열기도 하지만, 때때로 존재의 분기점을 슬쩍 보여주고는 사라진다. 우리는 그 향기를 통해 살았던 나와, 살 수 있었던 나,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 가능성으로만 떠도는 나를 잠깐 마주친다.
어쩌면 후각은 시간을 가장 정직하게 다루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과거를 불러오되 그리움으로 포장하지 않고, 미래를 보여주되 불안으로 채색하지 않는다. 그저 '이것도 너의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향기 속에서 만나는 미래의 나는 늘 자연스럽다. 마치 그 삶이 이미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중 몇몇은 끝내 현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냄새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피어난다.
마치 삶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그저 조용히, 감각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