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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매미, 끝을 아는 생은 더 뜨겁다

긴 침묵 끝, 울 수 있는 생에 대하여

by 그냥 하윤

여름의 창밖은 똑같다. 똑같은 햇빛과 똑같은 매미 소리. 하지만 올해 그 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어디선가 고장 난 스피커처럼 삐걱거리며 울리는 그 울음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오래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튀어나온 듯한 그 감정은, 익숙해서 더 낯설었다. 나는 지금도 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소리가 나지 않을 뿐.


매미는 대부분의 생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산다. 7년 혹은 그 이상. 어둡고 습한 흙 속에서, 세상의 시선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존재만으로 충분한 시간을 산다.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고, 외롭지도 다급하지도 않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은 그에게 말한다.

“이제 나와야 할 시간이다.”

그제야 매미는 흙을 밀치고 나무를 타고 오른다. 말라붙은 허물을 벗고 마침내 날개를 가진다. 기다림 끝에 얻는 건 어떤 능력이 아니라 울 수 있는 자격이다.


이 빛을 보기 위해 그렇게 오래 견뎠는지도 모른다


매미가 세상에 나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울음이다. 거의 먹지도 않고, 멀리 날지도 않는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운다. 마치 그 소리 자체가 존재의 전부인 것처럼. 울음은 단지 짝짓기를 위한 신호가 아닌 기다림의 증거이자 침묵의 반동이다. 침묵이 길수록, 그 침묵을 깨는 일은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단 며칠 울다 죽는 인생이라니 너무 허무하지 않냐고. 하지만 그 울음은 기다림의 전부였다. 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결심인가.


매미는 울기 위해 태어났다고들 말한다. 어쩌면 울 수 있어서 여한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 며칠이라도 누군가를 부르고, 사랑하고, 소리를 남기고 떠나는 생. 그건 충분히 충만하다. 삶의 가치는 길이에만 있지 않다. 어떤 순간에 얼마나 깊이 도달했는가에 있다. 짧기 때문에 더 진하다.


단 며칠의 생, 그 끝에서 남긴 마지막 울음


우리는 매미보다 오래 산다. 그렇기에 오히려 침묵 속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타이밍을 재다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지나치는 날들이 쌓인다. 우리는 그걸 조심성이나 인내심이라 부르지만 매미의 방식은 다르다. 그들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그 생에는 부끄러움이 없고, 계산도 없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울 뿐이다.


여름이 끝나면 매미는 사라진다. 울음도 멎고 나무는 조용해진다. 다시 조용한 계절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여름이 공허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침묵이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건, 그 전의 울음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다음 해, 같은 나무에서 또다시 울음이 들릴 때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또 여름이 왔구나.”


울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멈출 뿐이다. 지나간 존재는 소리로 남고, 그 소리가 계절을 다시 만든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울음이 소리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어떤 기억의 풍경 속에, 사라진 존재의 흔적이 잔향처럼 남기도 한다.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진심을 다해 살아낸 순간은 어딘가에 남는다. 그건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짧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질 수 있다.


나는 매미처럼 살고 싶다. 짧더라도, 분명하게. 들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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