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로 남은 가능성이 지금의 나를 규정한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기간이 만료된 남색의 여권 케이스를 발견했다. 커버를 덮는 순간 '딸깍' 하고 나는 소리가 방 안에 또렷이 퍼졌다. 한때는 그 소리가 낯선 도시로 나를 데려갈 출발 신호처럼 들렸다. 공항의 탑승구에서 들리던 방송, 낯선 간판들의 활자, 비행기표의 바스락거림 같은 것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런데 그 여권의 페이지들은 의외로 많이 비어 있었다. 찍히지 않은 도장들이 공백처럼 남아 있었고, 그 빈칸들이 오히려 내가 가지 못한 길들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열리지 않은 페이지가 남긴 고요는 오래전 내가 멈춰 선 갈래길을 떠올리게 했다.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공백의 감각이, 잊었다고 여겼던 순간들을 불현듯 불러냈다.
기억은 10년을 훌쩍 넘긴 어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 간판에 맞춰 전공을 낮춰 선택한 순간, 이미 처음부터 원하는 공부는 내 손에서 멀어져 있었다. 강의실의 수업은 좀처럼 흥미롭지 않았고 책 속의 지식은 낯설기만 했다. 대신 내 시선을 오래 붙잡은 건 타이포그래피였다. 활자의 형태가 지닌 힘, 종이 위에서 만들어내는 리듬이 강의 내용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무렵 언젠가는 유학을 가서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돌아와서는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며 그 가능성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하지만 기회의 문턱에 가까워질수록 현실은 점점 크게 다가왔고,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길을 고집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나를 압도했다.
돌아보면 이 포기가 지금의 나를 더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타이포 디자인은 지금 오히려 각광받고 있고,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그 흐름 속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나는 그 물결에서 한 발 비켜난 채 상업적 디자인에 몰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택하지 않은 전공, 중도 포기한 유학, 그 부재가 지금의 나를 현재 위치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는 셈이다.
또다른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 친구에게로 닿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일찍이 석사를 마치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길을 걷는 듯 보였다. 학문적으로도 인정받았고, 주변의 시선은 언제나 그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속사정이 있었다. 한때 의대를 준비했지만 끝내 그 길을 택하지 못한 것이다.
"의대에 갔으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 사람 살리는 일을 하면 보람도 느끼고, 사회적인 인정도 받았을텐데."
그 짧은 고백은 의외였지만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화려한 성취 뒤에 감춰진 아쉬움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보다 끝내 선택하지 않은 길이 그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둘러싸고 있다는 느낌. 모두가 그를 대단하다고 여겼지만, 정작 그는 선택하지 않은 길의 그림자를 늘 곁에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설명할 때 자신이 살아온 선택들의 합을 말한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누구와 만나고 또 헤어졌는지. 일종의 연대기를 따라 늘어선 선택의 궤적이 곧 나라는 존재의 이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하지 않은 선택들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짙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내가 해온 선택들일까, 아니면 하지 않은 선택들일까. 어느 쪽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무게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정체성은 실현된 가능성보다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총량에 더 강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이 남겨놓은 그림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삶을 비추는 역설적인 빛을 낸다.
그렇다고 이 부재들이 늘 아쉬움이나 후회의 형태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길은 삶의 결핍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의 선을 또렷하게 그려주기도 한다. 원하는 공부를 중도포기한 것은 나를 상업적 디자인에 오래 머무르게 했지만 동시에 다른 종류의 눈과 손을 키우게 했다. 또 의대를 가지 않은 그 친구는 연구원으로서 자기 길을 걸었고, 팬데믹 시기에는 키트 개발에 참여해 사회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가지 않은 길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시에, 자신의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는 '하지 않은 나'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예체능을 선택하지 않은 나, 다른 학교에 들어간 나, 끝내 고백하지 않은 나, 다른 도시로 옮기지 않은 나. 이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적도 없다. 오히려 이 부재들이 현재의 나를 가장 선명하게 둘러싼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가능성이라는 건 실현되지 않아도 우리를 규정한다는 것. "자유는 곧 가능성의 총체"라는 어느 실존주의 철학가의 말처럼.
우리는 늘 완전하지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정체성은 성취와 경력의 합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내가 하지 않은 선택, 끝내 가지 않은 길, 부재로만 남은 가능성들. 그것들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시에 내가 걸어오지 않은 길들로도 이루어져 있다. 살아낸 나와 살아내지 않은 나, 그 두 겹의 결이 겹쳐져 지금의 나를 드러낸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의 나 역시, 아직 하지 않은 선택들 위에서 다시 모습을 갖춰갈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은 늘 그림자로만 남지 않는다. 때로는 새로운 길의 발판이 되고,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의 모양을 은근히 비춰주기도 하니까.
여권을 다시 덮었다. 닫힌 표지 너머로도, 채워지지 않은 빈칸들의 감각이 손끝에 오래 맴돌았다. 결핍이 아니라, 언젠가 또 다른 길로 이어질 여백처럼 고요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