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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흐른 저녁이 내게 남긴 말

길이 막힌 건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by 그냥 하윤

토요일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텐데, 그날따라 차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된 듯 멈춰 있었고, 시야 가득 늘어선 브레이크등들이 붉은 점멸을 반복했다.


이 시간대 동호대교는 늘 막힌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집인데 이상하게도 늘 이곳에서 발이 묶인다. 몇 분이면 닿을 거리에서 수십 분을 보내는 일은 익숙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갑갑했다. 앞만 보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까지 갇힌 듯했다.


한 주 내내 그랬다. 계획은 어긋났고 작은 일들조차 흐트러졌다. 말없이 쌓여온 피로는 점점 무게를 더해 어깨를 짓눌렀고, 그 답답함은 차창 너머 풍경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히는 걸까.' 한숨이 새어 나올 즈음,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조수석 창문 너머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다. 하루 종일 무겁게 덮고 있던 잿빛 하늘이 서서히 물러서더니, 그 자리로 주황빛이 물감처럼 번져 들었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붓을 적시듯, 빛은 천천히 세상을 다시 칠해나갔다.


강물은 그 따스함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잔물결 하나하나에 빛을 새겨놓았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갈 도심의 풍경도 이 순간만큼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 스며든 노을이 차가운 콘크리트마저 부드럽게 감쌌고, 세상은 잠시 제 호흡을 가다듬는 듯했다.


운전대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면 지나쳤을 장면이었다. 시계만 째려보며 조바심을 냈다면 그저 스쳐 보냈을 순간들. 정체라는 불청객이 오히려 내게 선사한 여유였다.


막힘 속에서 잠깐 본 노을처럼, 이 시간들도 결국은 흘러가고 다음 장면이 열릴 것이다.


막힘은 언제나 불편한 것일까. 어쩌면 이 느려짐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라 잠시 멈춰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멈춤이란 언제나 실패의 표식만은 아니다. 어떤 정체는, 쉼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기도 한다. 초조함 끝에 찾아온 이 정적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나 자신과 단둘이 마주한 듯했다.


지난 한 주를 돌아봐도 그랬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고, 미처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힘은 언제나 손실만은 아니다. 어떤 느려짐은, 잃는 것이 아니라 다시 채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 시선이 머무는 동안에도 차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정체는 불편하지 않았다. 도로 위 붉은 불빛들이 여전히 늘어서 있었지만, 하늘의 노을이 그 위를 덮으며 세상을 다른 빛으로 바꾸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선명한 그 장면 속에서, 나는 조금은 평안했다.


잠시 후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하늘의 빛은 보랏빛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아쉬움이 스쳤지만 그 순간을 눈에 담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리 서둘러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짧은 장면은, 오히려 멈춰 있었기에 나에게로 왔다.


우리는 늘 앞을 향해 달려가려 한다. 멈춤은 손해 같고, 막힘은 불운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느려짐은 우리를 새로운 풍경 앞에 세워놓는다. 정체가 있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인생의 더딤 속에서도 놓칠 뻔한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토요일 저녁, 돌아오는 길에 만난 그 노을은 오래도록 남았다. 정체가 아니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순간, 멈춰 있었기에 비로소 내게로 온 풍경이었다. 그 빛의 시간은 내게 말없이 일러주고 있었다.


앞만 보지 말고, 잠시 옆을 봐도 괜찮다고. 멈춤은 실패가 아니라, 쉼이라는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쉼이야말로 다시 나아갈 힘을 다시 채워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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