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관성을 멈추는 낯선 감각
매일 아침 거울을 마주한다. 눈, 코, 입, 약간 늘어진 턱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 매일의 습관이 찍어낸, 어제의 잔상 같다. 그런데 어떤 날은 그 익숙한 거울 속에서 미세한 균열을 발견한다. 분명히 나인데, 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저 눈빛, 저 표정, 저 익숙해야 할 형체가 마치 누군가의 흉내처럼 보인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거울을 바라본다.
그 낯선 감각은 하루를 통째로 따라왔다. 매일 걷는 길, 매일 듣는 거리의 소음, 익숙한 간판들. 모든 것이 어제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처음 같았다. 간판 위의 '은행'이라는 글자는 소리와 의미가 분리된 채, 단지 검은 획들의 집합으로만 보였다. 그 단어의 뜻을 내가 정말 알고 있는가. 그 순간, 나는 이 세계에 처음 초대된 이방인 같았다.
심리학에서는 이 이상한 감각에 '자메뷰(Jamais vu)'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시감, 익숙한 것을 처음 보는 듯 느끼는 순간.
이런 경험은 흔히 기분 탓이나 '피로'라는 말로 가볍게 넘기기 쉽지만,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감정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것은 현실이 아주 살짝 비틀린 듯한 느낌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하던 동작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처럼.
그 감각은 단순한 헷갈림이 아니라, 존재의 얇은 껍질이 잠시 벗겨지는 일이다.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정체성, 기억, 자기 자신—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반복과 익숙함이라는 얇은 껍질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익숙함은 편안하지만 동시에 감각을 잠재운다. 우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쪽에 더 가까워진다. 익숙함은 우리를 지켜주는 동시에, 존재를 조용히 재우는 은밀한 수면제일지도 모른다.
가장 깊은 당혹감은, 가장 확실해야 할 자아의 형태가 흔들릴 때 찾아온다. 거울 속 존재가 분명 나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영영 이어지지 않을 때. 그때 이 얼굴이 나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다는 기억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진다. 가장 익숙했던 나 자신이 가장 낯선 존재가 될 때, 삶의 토대가 살짝 기울어지는 순간이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라는 감각이란 결국 습관과 희미한 기억으로 맺어진 임시의 약속 같은 것임을.
그 짧은 어긋남 속에서 의식은 잠에서 깨어난다. 그것은 소란스러운 각성이 아니라, 아주 고요한 방식의 깨어남이다. 익숙함의 무게가 잠시 내려앉고, 세계가 다시 처음처럼 맑게 느껴지는 순간. 시야를 덮고 있던 얇은 막이 잠시 걷힌다. 세상은 원래 그런 모습이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었기에 그렇게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제야 문득 묻게 된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정말 알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를 익숙한 사람이라 부르며 안심할 때, 우리는 그들의 숨겨진 '낯섦'을 외면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익숙하다고 규정할 때, 우리는 내 안의 무한한 불확실성을 모른 체한다. 내가 익숙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사실은 언제든 낯선 그림자처럼 변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 설명할 수 없는 불일치 속에서 우리는 서늘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낯섦을 불쾌한 오류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 속에는 묘한 각성의 빛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미시감이야말로, 우리의 의식이 깊은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우리를 무심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 머물게 하지만, 낯섦은 다시 삶을 바라보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 감각은 현실을 새로이 바라보게 하고, 익숙함이라는 울타리에서 잠시 벗어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일은 어쩌면 '나로 존재하는 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익숙함의 껍질을 부수고, 가장 낯선 곳인 자기 자신의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용기.
'이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들이 당신을 다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라. 낯섦은 사라져야 할 오류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불안하고 성숙한 방식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