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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인간의 가장 품위 있는 증명이다

고독은 결핍이 아닌 존재의 전제

by 그냥 하윤

공기가 유난히 차가운 날이었다. 며칠째 이어지던 가을비가 막 그친 뒤라 공기에는 습기 대신 묘한 냉기가 남아 있었다. 인도엔 젖은 낙엽이 층층이 깔려 있었고, 유리창 너머의 하늘은 맑았지만 이상하게 텅 비어 보였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는데도 손끝은 금세 식었다.


대화는 가벼웠다. 별다를 것 없는 근황, 바쁜 일상, 그리고 늘 그렇듯 한두 마디의 날씨 이야기. 내 앞에 앉은 이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한때는 서로의 마음을 다 안다고 믿었던 사람.


말들은 공기를 따라 흘러갔지만, 그 안엔 어떤 미세한 단절이 있었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닫혀 있고, 말끝마다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묻어났다. 그 틈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건 날씨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 미지근했던 건 계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기의 온도와는 별개로, 사람 사이에도 온도가 있다. 말이 오가고 웃음이 섞여도, 어느 순간 마음의 온도는 서서히 낮아진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차가움은 대화보다 먼저 스며들고, 침묵보다 오래 남는다.


예전엔 그걸 나와 그 사람의 부족함이라 여겼다. 어딘가 결핍된 것처럼, 마음을 끝까지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였다. 서로에게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그런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태생의 질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지닌, 보이지 않는 설계도다.


도시는 깨어 있지만 마음은 저물어 간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필연적으로 분리된 존재로 세상에 던져졌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한들, 타인의 내면은 끝내 닿을 수 없는 영원한 타지(他地)와 같다. 그 간극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외로움'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구조가 지닌 전제에 가깝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사실을 자연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선명해졌다. 밥을 혼자 먹고, 영화를 혼자 보고, 그 고요 속에서만 생각이 가라앉았다.
다만 주변 사람들 중 간혹 "혼자 다니면 안 외로워?"라는 질문을 건네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외로움은 사람의 수로 계산되는 감정이 아니니까. 사람이 많아도 마음이 비어 있는 공백이 있고, 홀로 있어도 충만한 고요가 있으니.


회사에 다닐 때의 나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일, 승진, 고과평가, 대인관계, 그리고 자격증 시험까지— 골머리 터지는 일들만 한가득이었다.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느라 감정은 개입할 틈이 없었다. 어떤 날은 피로가 감정을 완전히 덮어쓰는 대체재가 되었고, 어떤 날은 그 피로가 오히려 이 근원적 단절감을 대신하는 기제가 되었다.


사랑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것은 나에게 버거웠다. 그건 애정의 부족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다. 누군가를 오래 사랑하려면, 나를 먼저 보존해야 했다. 사랑은 이 공백을 메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고요를 존중하는 일이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은 오후


하지만 관계의 공백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서둘러 채우려 한다. 그것을 외로움이라 부르며, 마치 치유해야 할 병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 감정의 정체는 외로움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시간을 채우는 법을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혼란'에 가깝다. 관계가 삶의 중심일 때, 그 중심이 흔들리면 자신도 함께 붕괴된다. 그 붕괴의 감각을 우리는 가장 순한 말로 '외로움'이라 명명하는 것이 아닐까.


‘비어 있음’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꽉 찬 순간보다 약간의 여백이 있을 때 삶은 숨을 쉰다. 그 틈에서 생각이 피어나고, 감정이 흐른다. 삶은 늘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며, 그 결핍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텅 빈 시간을 견디는 일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 자리를 버티다 보면 언젠가 그 안에 새로운 온기가 스며든다. 그건 사람일 수도, 일일 수도, 혹은 단지 한 줄의 문장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채움의 속도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하는 나의 온도다.


카페를 나와 혼자 천천히 걸었다. 비에 젖은 낙엽이 발끝에서 부서지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외로워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가장 온전한 나로 존재했다.


발끝의 소리 사이로, 한 생각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완전히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손을 내민다. 그리고 가끔은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 그 반복이, 그 모순이 인간을 조금은 아름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사라져야 할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고요하고 품위 있는 방식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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