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공간1 경남학사

서울살이의 첫 집이었던 경상남도남명학사

by 조성영

내 대학생활의 ‘공간’들을 떠올려보려 한다.

제일 먼저, 서울살이의 첫 집이었던 경상남도남명학사.


#일찍부터

나는 일찍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열일곱, 고1부터.

그 과정에서 가족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립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부모님과 사랑을 주고받지를 못했다. 말하자면, 받기만 했다.


한 주 내내 공부를 한 나는, 주말에 짧게 집에서 지낼 때는 긴장이 풀려 잠만 잤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무어라도 더 사주려 하셨고, 어머니는 아들 얼굴 좀 보기 위해(당시 나는 옷이나 간식을 가져다주시는 목적인 줄로만 알았다) 기숙사로 자주 찾아오셨다.


부모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으며 ‘부모들은 왜 저럴까’, ‘왜 나를 이해 못 해줄까’ 투덜대기도 하고, 수험생활의 예민함으로 함부로 말한 후 뒤돌아 후회하고, 결국은 쭈뼛쭈볏 사과하고 화해하며 돈독해지는, 비유하자면 밭갈이의 과정을 나는 건너뛰었다.


나에게 부모님은 거절도 않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명예로우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반드시 보상하고 싶은, 상환일 없는 대출 같았다.

내 인간관계 애정의 방식이 헌신적인 것도, 내가 받으며 배운 게 그것 하나였기 때문도 있을 테다.


한자 뜻대로 자립(自立), 스스로 버티는 능력은 얻었지만, 휘청거릴 때 부모님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 부모님의 도움을 ‘잘 받는’ 방식을 익히지 못한 채, 나는 어려움을 말하지 않고 혼자 해낼 줄만 아는 성실이로 자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춘기라는 계단을 차근히 오르지 않고 두세 칸씩 뛰어올라왔다.


그때부터 나는 외로움에 익숙한 것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온 듯하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고 상경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떨어진 나는 –경남 사람인 내가 왜 떨어지냐고!- 다행히도 입학하는 해에 준공이 끝나 입사가 가능했던, 수서역 근처의 경상남도남명학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음, 하지만 결국 그게 잘된 일이었냐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엇보다 경남학사에서의 나는 외로웠다. 2인1실의 룸메와 잘 안 맞았다. 그는 완전 집돌이로서 침대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대폰 하기를 즐겼는데, 반대로 나는 밖을 싸돌아다니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간을 점유하는 시간이 더 긴 그가 호실의 주인처럼 느껴졌는지, 방이 편하지가 않았다.


또, 휴식하는 공간에 혼자 있지 않다는 그 사실이, 쉬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게 했다. 나만의 오롯한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자주 갔던 건, 바로 층마다 있는 공용세탁실이었다. 분리형 원룸처럼 불투명 유리로 구분된 안쪽에는 세탁기와 건조대가 5~6대 있고, 널널한 바깥쪽 공간에는 큰 하나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자리한 그곳에서, 나는 야식도 간식도 먹고, 영상도 보고, 통화도 하고 멍도 때렸다.

세탁기 통이 돌아가는 적당하고 규칙적인 소음, 상쾌하게 습한 공기, 세제의 깨끗한 냄새와 섬유유연제의 부드러운 향기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 안전한 기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은 당연히 빨래다. 이불 빨래를 위해 무인빨래방에 갈 때면, 산에 올라 기지개로 상쾌함을 마시듯 그 공간을 충분히 느끼다 온다.



#위기감, 불안감, 그리고 피로

이십대를 시작하던 그때는, 대학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입학하기도 전부터, 잘 곳이 없어 용산 찜질방에서 어색하고 쌀쌀한 밤을 보내며 사실상 무박2일로 축구부 모임에 꾸역꾸역 참여하던 나였다. (찜질방에서 자는 게 그렇게 추울 줄이야.)

그런 나는 개강 후 여기저기 술자리에 거의 빠지지 않았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앉아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 잘 모를 때 만들어지는 우연에 의한 인연을 놓쳐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학사 밥이나 먹고 있는 동안,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얘네가 친해져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위기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자리를 일찍 떠나는 법이 없었다. 학사는 수서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걸어서는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었는데, 늦어도 10시에는 귀가를 시작해야 했다. 학사로 가는 버스의 막차가 꽤 일렀기 때문이다. 강남 뱅뱅사거리에서 파란 버스를 탄다면 오래 걸리는 대신 출발시각을 더 미룰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택시비 3만원을 내기도 했다.


문제는 통금시간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당시 오후11시30분에 학사 정문이 잠겼다. 1시간반 정도 걸렸던 교통을 고려하면, 새내기들에게는 거의 초저녁이라 할 수 있는 10시가 나에겐 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한참 달아오를 때 혼자 멈추어야 한다는 걸 나는 받아들이지 못해, 대신 통금시간 신경쓰는 걸 멈추기로 했다. 뱅뱅사거리 막차를 겨우 타는 날들이 대부분이었고, 돈이 소중한지 모를 때라 택시도 많이 탔다.


꽤 자주, 나는 완전소등된 학사의 정문에 도착했다. 그때마다 경비아저씨께 (1시 정도 되면 경비실 또는 사감실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창문을 툭툭 두드리며,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혹시 문 좀..” 했다. 그러면 아저씨는 가끔은 인자하게, 또 귀찮으실 때는 그걸 숨기지 않는 표정으로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어느 종이에 인쇄된 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셨다. 그러면 나는 이름과 방 호수를 적고 안으로 들어갔다.



#벌점1

그 적힌 이름으로 벌점이 하나씩 주어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6월 종강할 때쯤이었나, 사감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니 벌점이 몇 점인지 아냐.”

“열..다섯쯤이요?”


그동안 이름을 몇 번 적었는지는 기억 못 해도, 사칙상 15점이 초과하면 다음 학기 강제 퇴거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일로 사감이 나를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숫자가 낮지는 않겠다만 간당간당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괜히 애매하게 말했다.


사감은 입가가 씰룩이는 듯 아닌 듯한 애매한 표정변화를 보이며, 컴퓨터 모니터로 돌아앉았다. 엑셀표 어느 열에 내림차순을 건 후 사감은 의자 쿠션에 몸을 뒤로 쭉 기댔다. 내가 옆에서 목을 내밀어 확인하니, 31이라는 숫자가 제일 위에 있었다. 수평으로 시선을 옮기니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서너 달 동안, 정확히 한 달의 날짜만큼 벌점을 받은 것이었다. 종종 온화한 경비아저씨께서는 그냥 들어오라고 하신 때도 있었으니, 음, 한 마흔몇 번 정도 늦게 귀가한 것 같다.


내 숫자 바로 밑을 확인하니 십몇이었다. 31이라는 숫자가 무얼 뜻하는지 짧게 생각한 후, 그렇다면 그게 상대적으로 높은 것인지 확인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나 말고 강제 퇴거에 해당하는 벌점이 아무도 없었다는 건 꽤 놀라웠다.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야 마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속으로 약간은 뿌듯했던 것 같다. 많이 놀고 오래 놀고 늦게까지 노는 게 자랑처럼 생각되었던 철없음이었다. 고등학생 때 공부만 했던 따분한(당시에도 따분하다고 느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시절을 '보상'받아야겠다는 마음의 발현이었을까.


잠깐 딴 데로 새자면, 대학 저학년 동안은 그 보상심리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해서 힘들었다. 학업에 정진하자니 ‘여태 그렇게나 했는데 놀 자격 있는 거 아니야?’ 싶었다. 막상 게임하고 술먹으며 시간을 보내니,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서울대 나온 값’이라는 높은 기대치에 못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한심스러웠다.

잘 놀고 다니는 친구를 보면 부럽고, 과외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는 본받고 싶던, 완전히 다른 두 방향으로 내달리는 욕심에 나는 나만의 무게중심을 못 찾아 휘청거렸다.



#벌점2

다시, 압도적인 내 벌점으로 돌아온다.


나는 속으로, 그해 개관한 경남학사에서 학생을 (불미스러운 일이 아닌 이상)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측을 했다.


“아.. 네. 어떻게 하죠..”


학창시절부터 연습해온, ‘제가 잘못한 건 이미 알고 있고 반성하고 있으며, 저 스스로는 이걸 어찌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압니다, 처분만 바라고 있습니다’ 하는 태도를 오랜만에 연기했다. 잘 놀고 다녀야 마땅한 스무살이 이런 저자세를 보이면 중년 사감은 반드시 봐줄 것이라는 계산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다.


결국, 벌점을 상점으로 상쇄하기 위해 나는 7월 한 달 동안 체력단련장 청소 봉사를 하게 되었다. 아침 9시마다 사감실로 가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기고, 같은 층의 한 20평 정도 되는 작은 체력단련장을 청소했다. 그러고 사감실로 돌아가 보고드리고 봉사자 확인란에 서명하는 식이었다.

한 달 내내 하면은 벌점을 까준다고, 사감선생님은 말했다. 내가 알기로 청소 봉사는 한 번에 상점 1점이었다. 그러면 16번만 하면 15점이라서 퇴거 조건을 피할 수 있는데- 그건 차마 눈치 보여서 말을 못 꺼냈다.


나는 그리하여 7월의 매일 아침, 요구르트 아주머니마냥 사감실로 갔다. 규칙을 어기고 벌점 받을 배짱은 있었어도 집행유예에서 더 까불 깡은 없었는지, 나는 (기억하기로는)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체력단련장 청소는 마치 학과 근로장학생처럼 별로 할 게 없었다. 공간도 넓지 않았고 쓰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 들어가서 청소도구를 내팽개치고 체조용 매트에 누워 휴대폰이나 끄적이며 시간을 죽이다가 나오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초기화된 0의 벌점으로 학사 첫 학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학기인 가을학기에도 나는 늦게까지 이리저리 싸돌아다니기는 했다. 하지만 대학동의 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다시피 했으므로 벌점 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일찍 들어가서 쉬는 날에만 학사로 갔고, 밤이 조금 늦어진다 싶으면 남의 집에서, 바닥에 깐 이불 하나로 몸까지 덮는 타코의 또띠아 같은 보온법으로 잠을 청하곤 했다.


피곤한 등하굣길과 외로움의 세탁실, 그리고 우울함을 산책하던 근처 아파트 공원까지, 돌이켜보면 새내기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장면들을 남긴, 나의 서울 첫 공간이었던 경상남도남명학사였다.


공간1.jpg 지금 보면 좀 안쓰러운 스무살의 나 (사진은 경남학사 아님)



#무사히

학사에서 나는 4개의 계절을 지냈고, 2학년이 되며 서울대기숙사로 왔다. 하필 옛날 건물로 배정받았는데, ‘76학번 누구’, ‘88학번 누구’라고 적힌 원목 창틀이 역사를 증명하는, 비유하건대 형무소 같이 생긴 낡은 건물이었다.


칙칙하고 찝찝했다만 금방 익숙해졌고, 버스를 타야만 통학할 수 있는 학교인데 아예 그 안에서 생활하는 편리함은 너무나 컸다. 3호선과 2호선의 부딪히고 치이는 갑갑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슬리퍼를 끌고 학교에 가는 것, 수업 20분 전에 기상해도 지각하지 않고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학사에 살 때는 정말 판타지처럼 생각되던 일들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수서 자곡동에서의 스무살을 떠올려본다. 매일 피곤했고 항상 불안했으며 자주 외로웠다. 또 종종 우울했다.


잘 못 꾸민 외모가 내 인상을 나쁘게 만들까 걱정하여 옷은 항상 정갈하게 차려입었다. 뭐라도 찍어발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피부는 하루종일 텁텁했다. 안경은 패션을 위해 가장 먼저 몸에서 떨어뜨려야 하는 물건이므로 렌즈를 썼다. 하드렌즈의 이물감이, 눈의 시간을 몇 배는 빠르게 흐르게 하여 오후만 되어도 눈이 지쳤다. 그 모든 불편함을을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견뎠나 싶다.


어쨌든 하루하루 살아냈고, 그 덕에 이제는 대학생활을 수기로 쓸 수 있는 나름의 부피가 쌓였다.

누군가한테는 공감이, 위로가, 조언이 될 수 있겠는데,

인생 선배들 말마따나,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사람들은 강하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무사히 종강만, 완주만, 졸업만 하면 된다. 지나고 보면 그게 곧 잘하는 거다.

몸과 마음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나도, 그저 시간을 건너오기만 했는데도 그 보상으로 추억과 기억과 역사와 흑역사를 가진 졸업생이 되었다.


항상 교훈적으로만 글을 쓰게 되는 나를 반성하면서 이번에는 그러지 말자 생각하며 시작한 글이었는데, 결국 또, 뭐 되는 사람인 양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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