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좋은 조언인지, 아니면 듣기 좋은 조언인지.
#엄격함
사람을 대하는 내 태도는 좀 특이한 듯도 하다. 나는 인류애가 강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엄격하다.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해, 고맙다 미안하다 인사말을 할 줄 아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 해결을 위해 말을 꺼내는 용기와 그 표현의 섬세함에 대해 나는 예민하다. 언젠가 지나가듯 들은 말마따나 나는 ‘피곤하게 산다.’.
이런 까다로움을 잣대로, 나는 타인을 자주 속으로 평가한다.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객관적인 의미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또 나를 잘 이해하고 나와 잘 통하는지를 따져본다. 그런 사람만 곁에 남기면서,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걸러야 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인간관계 울타리 밖으로 보낸다.
결국 내 곁에는 몇몇 올바른,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들과 일부 나와 상황이나 성격과 성향이 비슷한 이들이 남았다. 나는 그들에게 인생의 크고작은 선택을 위한 조언을 구한다. 뜯기 편하게 포장된 택배처럼 고객친화적인 아이디어를 내주는 사람들이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저번 겨울이 끝날 때쯤 졸업한 후, 나는 글을 써서 책을 내기 위해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근 중이다. 그러던 중 최근에 학교를 산책하는데, 알고 지내는 선배 형님을 마주쳤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으시고 대학원에 계신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뭐하고 지내니?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대학생활을 에세이처럼 책 내려고, 도서관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뭐, 그러면 다음 학기에 대학원 갈거니?
“네. 내년 전반기 입시가 올해 10월이길래, 전까지 책 내고 준비하려고 합니다.”
내 말을 듣고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 형님은 내 어깨에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아, 네. 절대 공백기를 1년 이상 가지지 말라고요.”
-그래. 책 쓰는 거? 좋아. 여행하고? 다 좋아. 근데 절대 무조건 1년 안에 해결해. 계약 없는 상태, FA 신분을 1년 이상 가지지마. 대학원 간다고 해서 시간 아예 없고 그런 것도 아니야. 가서도 뭐든 할 수 있어.
-내 말 들어. 진짜로. 진짜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일방적으로 나에게 조언을 하는 관계는 주변에 별로 없다 보니, ‘그냥 내 말 들어라’식의 말을 들은 건 오랜만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걸까. 당사자인 내 의견을 묻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을 마주할 때는 항상 조금씩 불쾌하다. 그 순간도 마찬가지로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무조건’, ‘어차피’, ‘원래’ 같은, 단정짓는 태도를 꺼려한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생각과 판단과 경험이 있으며 고로 정답을 말하기 쉽지 않아야 할 텐데, 내가 찾아가고 있는 길을 자신의 결론으로 덮어버리는 것 같다는 거부감이 든다.
사실, 그 형님에 대한 불편은 이전부터 있었다. 선배와 후배, 형과 동생, 조교와 학생 사이로 지내면서도, 아무한테나 반말을 쉽게 하는 태도가 그 이유였다. 자신보다 아랫사람(특히 나이)이라고 판단하면 바로 말을 낮추며 하대하는 느낌을 주어서 별로였다.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이번에 마주쳤을 때도 ‘이 사람 꼰대다’ 편견을 가진 채 대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의도치 않은 멘토링의 시간이, 왠지 아주 인상 깊었다. 내 자유로운 생각을 가로막는다는 거부감이 들면서도, 꽤나 합리적이고 명료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단호한 눈빛이, 얼마나 진심을 담은 의견을 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 사람이 말하는 방식은 전혀 안 달라졌을 텐데, 내가 달라진 건가.
어느새 내 어깨에서 팔꿈치로 옮긴 손은, 떠나려는데 붙잡는 듯한 약한 완력마저 느끼게 했다.
자기가 옳다는 걸 다른 사람을 통해 증명하려고? 또는 과거를 후회한 것이 투사되어서? 그의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진심으로 설득하려는 태도로 보였고, 설득력도 있었다.
#인간관계의 알고리즘
5분도 채 안 되었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와 관계가 얕은, 친하지 않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은 딱히 들을 필요 없다는 가치관과 함께 살아왔었다. 남일이니까 쉽게 함부로 말한다고 전제를 하곤 했었다.
근데 어쩌면, 잘 모르는 덕분에 객관적인 조언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발상의 전환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너 인턴 안 했고, 취직 생각 없지, 근데 대학원은 생각 있지, 그럼 뭘 고민해.”
단호하고 단정적이지만, 필요한 정보와 상황만으로 판단하는, 그런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나한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지금껏 내가 어떤 사람들과 말들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해놨는지를 되돌아보았다. 유튜브처럼 반복되는 알고리즘에 의해, 독서실 1인 책상처럼 좁은 의견과 시야 안에서 지내왔던 건 아닐까.
내 주변의 사람들은 많이들 나를 공감해주고, 무엇보다 존중해준다.
내가 알아서 잘 한다는 걸 인정해주기 때문일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종종 그들의 말이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의 내가 직업적인 방향을 고민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심적으로 불안이 크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했는데, 곁에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만 가까이 해왔던 나였다.
#걔 누군데?
이 일화를 바탕으로 내가 하고픈 말은, 조언을 구할 때는 그 조언자가 ‘누구’인지에 너무 얽매여있지는 말아야겠다는 거다. 조언자가 아닌 조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은 나에게 딱 맞는 의견을 주기도 하지만, 그 가까움 때문에 오히려 숲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신의 조언이 상대에게 줄 영향까지도 고려해버림으로써, 정확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응원만 할 따름이기도 하다.
각자의 믿을 만한 사람은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허나 진실은 실용성을 데리고 다니지는 않으므로,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옆을 걸어줄 수는 있지만 내 앞에서 끌어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조언을 구할 만하다고 보통 인정되는 성공한 사람은 어떨까. 이번엔 내 얘기를 해본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원도 과외도 심지어 인터넷강의도 안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기만도 자랑도 아닌 조언으로서 후배들에게 말할 수 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라고.
그러나 수험생활에 대한 내 지론은 타인에게 도움이 전혀 못 되는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의 경험을 들어봐도 그렇고, 실제로 내가 그 가치관을 가진 채 가르쳤던 과외가 실패한 것도 그렇고.
내가 대학입시에 성공한 것은 좋은 기숙사, 좋은 친구들, 좋은 부모님의 유전자, 그들 중 하나 또는 이상에 의해서였다. 단 하나의 개별 사례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데도 나는 내 성공 때문에 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성공이란 것은, 너무나 다양한 요소들이 맞물려서 만들어지는 개별 경험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성취한 한 명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범인을 잡기 전 은신을 위해 치킨집을 인수해서 대충 닭이나 튀기려는데 마침 부모님이 수원에서 왕갈비를 하셔서 그 레시피로 양념을 만들었더니 그게 대박나버린, 도대체 어디부터 따라해야 할지도 모를 비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좋은 조언, 듣기 좋은 조언
나의 대학생활은 사람을 판단하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내 인간관계는 많은 자영업자가 손님에게서 경험하듯 처음에 팍 커졌다가 우하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얼굴들, 작은 인간관계에 만족하며, 그들에게 기대어 내 판단과 결정과 선택을 확인하고 인증받곤 했다.
이제 대학은 끝났고, 관련된 관계를 수정하기에는 늦은 것 같다. 어느 정도 확정된 사람들 속에서 자주 지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뭔가를 찾고 구하고 얻으려고 할 때는 ‘누구’에 집착하기보다는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사기꾼은 걸러야 한다)
나한테 없는 것은 나한테 없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아 그들 곁에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과 자주 대화하고, 의견을 묻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언젠가 나와 내 주변에서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할 때, 스스로 이것을 질문한 다음 남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하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좋은 조언인지, 아니면 듣기 좋은 조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