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공간2 피씨방

내가 어느 나이에 가더라도 내 몸에 딱 맞는 놀이터

by 조성영

나의 대학생활은 어떤 공간들을 거쳤나.


어떤 공간에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머물렀는지로, 한 사람의 인생을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쓴 공간, 그 중 하나는 단연 피씨방이다. 허나 피씨방이 나에게 어떤 곳이었냐 하면, 단순히 ‘그냥 게임하는 데’는 아니었다.


#1

경남학사에서도 서울대기숙사에서도 나는 나만의 오롯한 공간이 필요했다. 왠지 호실은 그런 곳이 되지 못했고, 세탁실처럼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세탁실만큼이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건 바로 피씨방이다.

세탁실과 피씨방은 꽤 다르다. 세탁실은 사람소리 없는, 깨끗한 공기 속에서 내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면, 피씨방은 사람도 냄새도 소음도 많았다. 하지만 나와 의자와 그 앞의 컴퓨터와 책상, 그 공간을 내가 단독으로 사용한다는 그 점유의 시간을 나는 즐겼다. 별의별 소리에 온갖 냄새가 겹치던 복잡한 와중에, 내 화면에 집중하면 적어도 그 좁은 공간은 폭풍 속의 고요 같은 나만의 세상이었다.


한 시간에 천원으로, 효율적이면서도 부담 없게 나만의 공간을 잠시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야구도 보고 밥도 먹었다.



#2

“왜 술을 마셔요?”

-잊어버리려고.

“뭘 잊는데요?”

-부끄러움을 잊는 거야.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신다는 거.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와 술주정뱅이의 대화-


‘간이 싱싱하다’는 말을 선배들로부터 듣던 때, 주량도 약하면서 뭘 그리 술을 마셔댔을까. 새로운 인연을 찾는 자리를 놓치기 싫어서도 있었겠다만, 고민거리들을 잠시 잊고, 결정해야 하는 걸 잠깐 미루고, 시간이 느린 걸 답답해하고 시간이 빠른 걸 억울해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했던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상황과 사람과 사건들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머리를 비우는 수단이었다, 술은.


나는 음주를 딱히 즐기지는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술에 취하는 대신 게임에 중독된 편이었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하기 싫을 때, 하고싶은 일이 있는데 할 수 없을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을 신경 쓰느라 지칠 때, 곧, 머리가 복잡할 때면 나는 그걸 잠시 내려놓고 싶어서 도망치듯이 피씨방으로 갔다. 차라리 밤을 아예 새워버리고 심연으로 감정과 사고가 빠져들 틈을 나 스스로에게 주지 않으려 했다. 도저히 잠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피곤함에 절여져서 기절하듯 침대에 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으니, 나는 보통 밤늦게 피씨방으로 가곤 했다. 학사 통금과 마을버스 막차 이후에 나간 날도 적지 않다. 애초에 한두 시간 게임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고, 잠들기 어려울 것 같은 답답함에 투항하여 오히려 잠을 쌓으러 가는 것이었다. 해가 뜨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만의 한 칸 자리를 반납하고 굶주린 배를 채운 후 방으로 돌아가, 해가 지는 시간이 될 때까지 잠을 자곤 했다.

게임하다가 생활 패턴이 망가지는 건 예사였고, 그로 인해 중요한 행사나 약속을 어긴 적도 있다.


이러한 자기파괴를 통해, 나는 역설적으로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마음의 근거를 얻기도 했다. 진도가 늦고 진전이 더디다는 자책과 아쉬움 같은 것들을, 아예 몇십 시간을 갖다 버림으로써 폭발시키고, 마치 새 하루 아니 새 해를 맞이하는 결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과 기분들을 쌓을 만큼 쌓아 한 번에 무너뜨리는, 말하자면 카타르시스 같은 방식으로, 다시금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는(또는 그런 힘을 내야 한다는 결심에 도달하는) 공간, 그게 나에게 피씨방이었다.


앞서 피씨방에서 ‘시간을 버렸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나는 게임이 안 좋은 취미라는 생각을 해왔다. 발전적이고 자주 반성하는 내 성격상,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쓸모 있으며, 또 사회관계에 있어 범용성 넓은 그런 취미가 분명 있을 텐데 – 독서나, 운동이나, 아니면 인기 있는 드라마를 봄으로써 타인과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든가 – 내가 아직도 게임이나 한다는 것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갓생, 미라클모닝, 엄격한 자기관리 따위의 수식어를 신경 쓰던, 더 밀도 있는 생활을 통해 나의 가치를 하루하루 끌어올려야 한다는 강박을 갖던 나에게는, 게임은 따지자면 점수 낮은 취미였던 것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게임이 백해무익하기만 했냐면 그건 또 아니다. 게임을 통해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희노애락이 있는 팀스포츠를 간편하게 즐길 수도 있다. 게임에는 정말, 인생이 담겨있다.

또,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서사와 서정을 전달받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순간순간을 선택하는 게임이 더 역동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분명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지속적인 취미로 삼아도 되는 건지 의심해왔다. 더 나은 취미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면서도, 취미라는 건 애초에 즐겁기만 하면 되지 않냐는 반론을 스스로 이어갔다. 아울러, 재미가 목적이라면 다른 건전한 여가를 즐기면 되지 않냐는 질문에, 게임이 건전하지 않을 게 뭐가 있냐는 역질문을 마음속에서 주고받았다.

결국, 생각하기 싫어서 피씨방에 갔지만 피씨방에 가는 것 자체도 나에겐 생각할 거리였던 것이다.


피씨방.jpg 짜계치는 못 참지


#3

이미 이십 년을 게임과 함께해왔고, 그 기간만큼 피씨방의 변천사를 몸으로 겪으며 자란 내가, 이제 와서 게임이 이렇다 피씨방이 저렇다 말하는 건 좀, 우스운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게임에 대한 내 생각이 단순해야 할 텐데 복잡한 것과 마찬가지로, 피씨방도 나에게 여러 의미를 가진 공간이라는 말을 나는 하고싶었다.


단순히 게임이 하고싶어서, 또는 방에 있기 싫어서, 우울한 밤을 헤매기 싫어서, 시간을 얼른 당기거나 차라리 미루고 싶어서, 그리고 번아웃 속에서 오히려 바닥을 찍고 올라오기 위한 자기파괴로써 나는 피씨방에 갔다. 그리고 지금, 지금은 가끔 친구들이랑 놀러가는 곳이 되어있다.


부모님 말씀이, 나는 어릴 때 흙바닥에서 그렇게 기어다니고 구르면서 놀았다고 한다. 옷이 항상 더러웠다고. 중고등학생 때는 축구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 딱딱한 모래바닥이었으므로 흙먼지 날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뛰어놀기보다, 넓은 은쟁반 모양의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잘 아는 듯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게 여가 생활이 되었다.


나의 놀이공간은 생애주기에 맞추어 바뀌어왔지만, 그동안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곳은 바로 피씨방이다. 내가 어느 나이에 가더라도 내 몸에 딱 맞는 미끄럼틀과 시소와 그네가 있는 놀이터, 피씨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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