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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부정하지 말자. 원래 남녀는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by 독자J

p.52~58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간 개인이 지닌 근원적 고독과 분리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프롬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가? 프롬은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양극성(兩極性)을 바탕으로 한 사랑도 사랑의 본질적 목적을 토대로 한다고 말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본질적으로 자신의 고독과 분리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이며, 다만 다른 형태의 사랑과는 달리 양성의 차이에 기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프롬은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양성은 본래 하나였으나 둘로 갈라졌고, 이후 양성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는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성의 양극성은 육체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육체와 달리 정신에서는 두 성이 결합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양성의 호르몬을 가지고 있으며, 심리학적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프롬은 이런 특성을, “남녀는 그 자체 내에 받아들이는 요소와 침투하는 요소, 물질의 요소와 정신의 요소를 갖고 있다.”(p.53)라고 말한다. 우리 내면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있고, 음과 양이 모두 있고, 빛과 어둠이 모두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 자체로 ‘통합적’이며, ‘다면적’이다. 우리 모두가 지킬이자 하이드이며, 조커이자 배트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적 성숙은 이러한 자신의 모든 정신적 측면을 수용하고 내면에서 통합할 때에 가능하다. 프롬은 이러한 ‘통합적’ 정신세계를 ‘생산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생산적 성격을 지닌 자만이 성숙한 자이며, 성숙한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롬의 말을 보자.


남자는-여자도 마찬가지지만-그의 여성적 극과 남성적 극의 양극이 합일할 때에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합일을 발견한다. 이러한 양극성은 모든 창조의 기초이다. (p.53)


물론, 이러한 양극성은 개인의 내면에서만이 아니라 물리적 관계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남녀라는 두 극(極)의 결합은 물리적으로는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며, 정신적으로도 두 남녀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다. 프롬에 의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p.53) 사랑을 하면 성숙해진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성장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즉, 프롬이 말했듯,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것이다. 양극성은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해와 달, 빛과 어둠, 음과 양, 물질과 정신, 온기와 냉기 등이 그것이다. 또한 받아들이고 침투한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양극성도 존재한다. 지구(땅)와 비, 강과 바다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양극성은 우주 만물을 만드는 기초이므로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양극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남녀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진정한 양성평등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다소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는 이성애자만큼 동성애자들도 본인들의 고독과 분리 불안을 극복하지 못해 사랑에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녀 간의 사랑에서 중요한 요소인 ‘성욕’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프롬은 프로이트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데, 프로이트는 “성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실패했다.”(p.58)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성욕을 사랑에서 성적 본능의 표현-혹은 승화-라고 보고, 성욕의 목적은 몸속에 화학적으로 생긴, 고통스럽게 갈망하는 긴장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에 불과하며, 성적 만족은 이러한 해소에 성공한 결과라고 했다. 프롬은 이러한 견해가, 성욕을, 마치 생물이 영양 부족으로 심한 갈망을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여 너무 단순화했으며, 남녀의 양극성과 그를 해소하려는 심리적 욕구를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성의 이론에 대한 세 가지 공헌>에서 프로이트가 리비도(libido; 관능적 쾌감의 기저에 놓여 있는 가설적 에너지. 실제 임상 장면에서 리비도는 성적 욕동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처: 네이버 상담학 사전)는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정의한 것도, 여성의 성욕은 여성 특유의 것으로서 남성적이지도 않고, 남성의 것과 개념적으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했다. 즉, 성욕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신체 중심으로만 단순화했다는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성적 매력은 신체뿐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나올 수 있다. 성격에는 남성적 성격(침투, 지도, 활동, 훈련, 모험 등)과 여성적 성격(생산적 수용성, 보호, 현실주의, 인내력, 어머니다움 등)이 있고, 한 사람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성별에 따라 자신의 성별에 맞는 성격이 더 우세할 뿐이다. 그에 따르면, 남성이 정서적으로 미숙하여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남성적 성격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할 때, 그는 성교에서 강력한 남성성을 발휘하여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려 한다. “남성다움의 마비가 극단적일 때, 가학성 음란증(sadism, 또는 폭력 사용)은 남성다움의 주요한-도착(倒錯)된-대용품이 된다. 여성의 성욕은 약화되거나 도착되면, 피학대 음란증(masochism)또는 소유욕으로 변한다.”(p.57) 성교에서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을 수도 있다. 즉, ‘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 측면까지 모두 고려하여 통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 기저에는 분리와 고독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이성과의 합일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롬은 인간 간의 본질적 특성인 양극성을 배척하려 하지 말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동성애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외하면, 지금의 남녀 갈등과 남녀평등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자연에서 서로 대립되는 성별과 특성이 있는 것은, 그 둘이 서로 조화되고 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웅동체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음과 양은 상호보완적이고, 둘이 만나 만물을 낳는다. 낮과 밤도, 빛과 어둠도, 삶과 죽음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자연은 양자의 조화를 통해 만물을 낳고 우주의 균형을 유지한다. 하물며 인간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란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시인 루미(Rumi)는 이러한 진리를 시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정녕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를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가 그를 원할 때뿐이다.
사랑의 불꽃이 ‘이’ 가슴에서 타오를 때
‘저’ 가슴에도 사랑이 깃든 줄을 알게 된다.
그대의 가슴에서 신에 대한 사랑이 자라날 때
온갖 의심을 넘어서서 신은 그대를 사랑했다.
또 한 손이 없으면 한 손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다.
거룩한 지혜는 운명이거늘, 이 지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운명 때문에 세계의 각 부분은 짝을 찾아 짝을 이룬다.
현자(賢者)의 눈에는 하늘은 남자, 땅은 여자이다.
땅은 하늘이 떨어트리는 것을 키운다.
땅에 열이 없으면 하늘은 열을 보내고
땅이 신선함을 잃고 메마르면 하늘은 이를 회복시킨다.
하늘은 아내를 위해 식량을 찾아 헤매는 남편처럼 땅 위를 돌고
땅은 주부(主婦)처럼 바쁘고 땅은 자식을 낳아 젖을 먹인다.
땅과 하늘은 지혜로운 자로서 일하므로
땅과 하늘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라.
땅과 하늘이 서로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왜 땅과 하늘이 애인들처럼 포옹하고 있는가?
땅이 없으면 어떻게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랄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을 위해 물과 열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의 결합에 의해
세계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끝까지 품게 한 것처럼
하느님은 존재자의 모든 부분에 다른 반쪽을 찾으려는 욕망을 심어놓았다.
낮과 밤은 겉으로는 적이지만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고,
서로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밤과 낮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밤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따라서 낮에는 소비할 것이 없으리라.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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