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 그리고 청춘의 그림자
인터넷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새는 아마 뱁새일 것이다. 매우 귀여운 ‘흰머리오목눈이’ 사진이 뱁새로 잘못 알려져 사람들의 심장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뱁새는 흰머리오목눈이가 아니라 붉은머리오목눈이다. 귀여운 정도는 비슷하지만, 둘은 다른 종이다.
비록 실제 뱁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 덕에 뱁새는 늘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황새의 그림자를 쫓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메타포로 자주 쓰인다. 최근 가수 이무진이 ‘뱁새‘라는 제목으로 신곡을 냈는데, 이 노래는 지치고 고된 시험기간에 큰 힘이 되었다.
-이무진, <뱁새> 中
누군가의 청춘은 화려하게 빛난다. 시끌벅적하고 유쾌하다. 나의 청춘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밋밋하고 재미없다. 공부하고 걷고 먹고 잔다. 거의 매일 후드티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도서관, 강의실, 기숙사를 오간다. 화려한 청춘을 동경한 적도 있었다. 공부가 너무 어려울 때는 ‘이렇게까지 끔찍한 걸 꼭 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장된 것 하나 없는 대학생활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학 가면 마음껏 놀 수 있다’ 던 선생님들의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었다. 때때로 나는 내 청춘은 왜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인가, 속으로 불평했다.
그러나 이번 학기 첫 기말고사 전날 농생대 라운지에서 새벽을 보내며 나는 이 또한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임을 느끼고 기뻤다. 자정이 지났는데도 자리를 꽉 채운 사람들이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외계어 같은 무언가가 잔뜩 적힌 종이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성실히 하고 가볍게 마무리하는 중일수도, 공부 따위는 잊고 지내다 발등이 고소하게 구워질 때쯤 벼락치기를 시작하는 중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순간 이곳에 모여 공부하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대체로 후줄근하고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청춘도 청춘이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과정도 청춘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과 싸우고 침묵 속에 수행하는 시간도 청춘이다. 치열한 노력도, 목적 없는 방황도, 무기력과 나태함으로 낭비한 시간도 모두 청춘의 구성 요소였다. 모두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의 귀하고 소중한 일부였다.
모처럼 이런 거창한 생각들을 하며 진중하게 공부했지만, 재미없다는 이유로 미루다가 벼락치기에 의존한 첫 시험에서 나는 장렬히 전사했다. 예정된 결과였기에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애정을 가지고 공부한 다른 과목들은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확한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내 역량은 후회 없이 펼치고 나왔다. 그렇기에 후련하게 종강을 맞이했다.
아무리 서울대가 예전만 못 하다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천재들이 많다. 다방면으로 놀랄 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나 같은 뱁새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괴롭지만은 않다. 산속에 갇혀 보내는 투쟁의 나날들이지만 학문의 기초를 배우는 과정 속에는 거대한 기쁨과 감격의 순간들도 종종 있었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직전, 나는 스터디 카페에서 밤을 새우며 화학을 공부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열역학 미분방정식 유도 과정을 처음으로 이해했던 순간, 머릿속이 백열등처럼 환하고 뜨겁게 빛났다.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치며 방방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이 순간이 대학교 1학년 시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이후에도 다변수 미적분학을 처음 배울 때, 회전 행렬의 공식을 머릿속의 이미지로 그리기 시작했을 때 등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다. 시험에서 모르는 내용이 나왔는데 직관을 이용해 나만의 방법으로 풀어냈을 때도 매우 짜릿했다. 마약을 해 본건 절대 아니지만, 마약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즐거움이라 나는 아주 괴로워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대부분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견디다 보면 별사탕처럼 순수한 기쁨의 결정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변태 같은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뭐야, 쟤도 천재면서 뱁새인 척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절대 천재가 아니다. 그저 그나마 잘하는 게 공부였던 사람이다.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 천재인데 나는 그 수준에 도달하려면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학부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차서 발을 동동 구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전공책을 노려보는, 열심히 공부한 시험을 대차게 말아먹기도 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다만 과정에서 행복을 찾고자 할 뿐이다.
이렇게 공부해서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은 이렇다 할 목표가 없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가 없기에 오히려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방황은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죽어서야 끝나는 게 방황일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은 항상 내 곁에 있다. 이제는 불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불안의 손을 꼭 잡고, 뱁새처럼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