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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예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도요

매일 할 일 목록이 끝이 없던 시험 기간이 끝난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자유의 감각이 낯설다. 종강한 대학생은 계절학기 개강 전, 하루를 통째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굉장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마음껏 공상하고, 글 쓰고, 밀린 집안일 해치우고, 책 좀 뒤적이면 그게 하루의 전부이고 행복이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없으면 쉽게 불안해진다. 괜히 영어 단어 책을 끄집어내고 인터넷에 ‘방학 계획’같은 걸 검색해 본다. 물론 실제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는데 고민이 많아지는 이유는 이 소중한 자유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작년 여름방학은 대학 부적응으로 인한 우울증과 싸우느라 생산적인 일을 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겨울방학은 병원 입원으로 인해 절반 이상을 날려먹었다. 그렇기에 대학생으로서 제대로 된 방학을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이라서 최대한 후회 없이 시간을 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



여름 계절학기 개강 전 일주일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저녁 기차를 타고 도착해 동네 맛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아빠와 빵을 사서 집으로 갔다. 본가에 오면 잠이 더 잘 온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호박잎쌈, 오이냉국 같은 여름 밥상을 즐겼다. 선풍기를 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엄마와 텔레비전을 봤다. 부모님이 모두 출근하면 나의 자유시간이 시작된다. 엄마가 씻어놓고 간 산딸기, 집에서만 먹는 믹스커피, 독서용 재즈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별 것 아닌데도 더없이 소중하고 그리웠던 일상이다. 타지 생활을 하면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15살 무렵 자아가 생긴 이후 약 5년간을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았다. 장애와 질병 때문에, 입시 때문에 투쟁하듯이 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원하는 대학도 합격했고, 건강도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생존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이 주어졌다. 지성과 감성이 있는 인간이니까 생존이 최종 목적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만 쓸 수 있는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방식으로 남기고 싶다.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고 예술로 표현하고 싶다. 자유와 영감이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진리를 배우고, 나 자신과 세상을 탐험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나는 계절학기 수업을 성실히 듣고,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과 식단 관리를 꾸준히 해서 건강을 유지할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는 데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발디는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고 했지만, 좋아하는 카페 창가에 앉아 아이스크림 라떼를 떠먹으며 팝송을 듣고 있으면 이 지상에도 조그마한 평화는 있는 것 같다. 기적은 시시하고 지루한 날들의 누적으로 만들어지고 성취는 길고 어려운 싸움의 연속으로 얻어진다. 삶을 비관하고 모든 걸 끝내고 싶었던 내가 이렇게 나 자신과 인생을 긍정하게 된 것도 기적이다. 한 학기를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마무리한 것도 성취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수많은 기적과 성취를 만들어내며 살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삶을 견디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고 성취니까.



타인에게 관심이 적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자폐인이지만, 부모님의 교육 덕분에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렇기에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이 사실을 상기하고 사람을 만나면 타인을 존중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는 중일 것이다. 자신에게 덜 가혹했으면 좋겠다. 타인을 존중하듯 자신을 존중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이룬 것들을, 비록 세상의 시선에서 보잘것없더라도 충분히 자축했으면 좋겠다. 산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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