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근대의 법철학자 : 홈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Jr., 1841~1935년)는 미국 연방대법원(Supreme Court)의 대법관으로 30년간 활동하면서 '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홈스가 단순히 반대의견을 많이 썼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반대의견을 많이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연방대법관 임기 동안 내린 1000여 건의 판결 중 반대의견은 72건 정도만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의견은 당시에는 소수의견이었지만 차후 상당 부분 법원에서 수용되어 판례로 남겨졌습니다.
그의 법사상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영미법(Common Law, 보통법)과 대륙법(Civil law, 시민법)의 차이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부분의 학자들은 독일 법철학자들이거나 아니면 오스틴처럼 영미권 사람이라도 영미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체로 "우선 법과 체계적인 법리를 먼저 정해놓고 그로부터 판결을 도출"하는 대륙법계 전통의 발달과 그 철학적 배경을 탐구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영미법은 "오랜 역사에서 축적된 판례들 중 구체적인 현재 사건에 유사한 것을 '유추'하고 그 논리를 끼워 맞춰서 판결을 도출"합니다. 따라서 대륙법은 사전에 정해진 법문과 법리에 더 구속된다면, 영미법은 판례에 실질적으로 구속되게 됩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대륙법은 영미법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대륙법계 국가의 법학은 때로 현실과 따로 노는 현학적인 학문이 되기도 하고, 영미법은 대륙법 보다 일관된 논리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구체적인 당해 사건에 보다 적합해 '보이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홈스를 비롯한 영미법계 국가의 법철학을 독일 대륙법을 계수하고 있는 한국에 그대로 적용해서 어떤 교훈을 얻는 것은 종종 어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전개한 '법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마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을 것입니다. 영미법과 대륙법의 차이를 유념하면서도 영미법계 국가의 법철학자들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홈스는 어떤 '법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을까요? 홈스는 단지 법원에서 만들어낸 판례 그 자체가 법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 판례에는 윤리적인 원칙이나 미국 법학계에서 인정되는 법리 등이 등장할 테지만, 홈스는 법을 이해하고 운용하는데 전제되어야 할 사람은 그런 판례의 '수사적 표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법 없이도 양심과 도덕에 알아서 구속되어 갈등 없이 잘 살 사람들이라면 법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홈스는 법을 이해하고 운용할 때 전제해야 할 사람은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면 때에 따라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악한 사람(bad man)'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학계의 합의된 법리나 일반 원칙으로부터의 연역적 추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그래서 법원이 뭐라고 판결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공권력 행사의 여부와 방향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자신이 손해를 볼 것인지, 본다면 얼마나 볼 것인지가 정해져 자신의 현재 행동을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을 전제하고 법을 이해하고 운용한다면 법과 도덕을 섞어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됩니다. 악한 사람에게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발생했다면, 그에게는 강제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지 그 원인이 되는 행위가 칭찬할 만한 것인지 아니면 비난할 만한 것인지, 혹은 법이 금지하려고 하는 것인지 내지는 허용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관을 전제한 법의 세계에서 법조인의 역할은 "법원의 판결에 따른 공권력의 행사의 여부와 방향을 예측해 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법 예측설(prediction theory of law)'입니다.
그럼 법학을 배울 때 익히는 체계화된 법리나 판례의 중요한 의미 등을 정리한 명제 등은 정체가 뭘까요? 홈스에게는 이건 그 자체로 법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법원의 판결을 좀 더 합리적으로 잘 예측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들에 불과합니다. 법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 권리나 의무들도 일종의 예언을 위한 도구들입니다. 이런 홈스의 법 현실 인식은 이다음 소개할 '미국 법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홈스는 생전에 법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저작을 남긴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7년 보스턴 로스쿨에서 진행했던 강연을 기록한 "법의 길(The Path of the Law)" 같은 강연문에서 등장한 그 법철학적 문제의식은 지금도 영미법계 국가의 법철학에서 고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는 도서를 구매하지 않더라도 읽어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곳에서 확인해 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대의 법철학 : 미국 법현실주의
통상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홈스의 영향을 받은 미국 법현실주의는 현대의 법철학에 해당합니다. 미국 법현실주의는 체계적인 법논리와 법개념을 통해 법을 이해하고 적용하면 누구나 당해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게 되는 법적 확실성은 환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법관이 법의 로직만을 좇아 일관된 판결을 산출할 수 있다는 '사법자동기계 테제'가 비현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법현실주의자들은 그 보다 법관은 신경과학적 증거가 그러한 것처럼 법관들도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그를 정당화할 증거를 찾아낸다고 말합니다. 또 이 과정에서 법관의 법에 대한 지식 보다 그의 감정, 직관, 편견, 성향과 같은 기타 비이성적 요소들이 더 많이 개입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판결은 법논리와 법개념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판결을 '예측'하는 데는 법학적 지식보다 차라리 법관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규칙회의주의(rule sceptics)라고 부릅니다.
한편 프랑크(Jerome Frank, 1889~1957년)와 같은 법현실주의자들은 규칙회의주의에서 머물지 않고 사실회의주의(act sceptics)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회의주의자에 따르면 이미 발생한 사건이 법정에서 증거에 의해 재구성될 때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증, 증거의 인멸, 변호사의 실수, 편협한 판사와 배심원 등에 의해서 이러한 사실발견의 오류가 발생할 위험성은 늘 존재합니다. 그중 특히 상충되는 증언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법관과 배심원의 선택에 따라 소송의 방향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이런 때는 사실상 재판이 그들의 주관에 완전히 의존해 버리게 됩니다.
사실확정은 주로 하급심에서 이루어지며 상급심에서는 대체로 하급심의 사실확정을 존중하기 때문에, 하급심에서 발생한 오류를 차후에 바로 잡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사실회의주자들은 지방법원의 사실발견이 이제까지 법실무자나 법학자들이 놓치고 있던 사법의 사각지대라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의 법학은 형식주의(formalism) 논리에 따라 법논리와 법개념을 정교하게 직조하는데 관심을 가졌지만, 이 모든 것은 실상 법적 확실성이라는 허구적 전제에 기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확정의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면에서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규칙회의주의와 사실회의주의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법현실주의자들에게 재판은 사실상 법창조 과정이 됩니다. 입법부가 성문법을 제정하긴 하지만 실제 재판에서 사실확정이 이뤄지는 구조나 법규가 법관과 당사자들에게 인식 및 포섭되는 메커니즘을 볼 때 재판에 미치는 법규의 영향은 과대평가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기보다는 재판이 벌어지는 당대의 현실 속에서 법규의 의미는 늘 재발견되는 것이기에 결국 재판의 본질은 판결이며, 법규가 아니라 판결이 곧 실질적인 법으로서 법원이야 말로 법창조 기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법현실주의자들의 결론입니다.
이는 성문법이 아닌 판례법 체제인 영미법계 전통을 지극히 잘 드러내는 법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 법현실주의를 다소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규칙회의주의가 전개한 성문법은 해석하기 나름이며 사실상 법관의 편견이나 심리적 성향이 판결에 있어서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재판의 취지를 오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법관의 편견이나 선이해가 재판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재판이 이슬람의 카디(قاضي) 재판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평가는 과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판을 하면서 복잡한 법개념과 법논리를 동원해 결론을 찾아가는 까닭은 무엇보다 '사건 당사자들이 판결에 이성적으로 납득하기를 요구받는 것이 헌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륙법계에서 명확성의 원칙을 강조하여 성문법을 제정하는 것도 그렇게 해야 일반적인 수준의 식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 법적 안정성 속에서 공권력의 작동을 이해하고 예측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법관이 전체 법질서와 조화되지 않아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권위로 찍어 누르며 법적 안정성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당사자가 늘 판사의 예측불가능한 권력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셈이 되고 그것은 전제군주제 하의 신민의 처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자유민의 삶이라 볼 수도 없고 법치주의 국가의 작용으로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관을 법 문언의 객관적 의미 혹은 입법자의 의도에 구속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규칙회의주의가 말하는 '판사의 편견'이 실제 재판에서 갖는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재판 과정 자체에 대한 신뢰를 몽땅 내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헌법 질서 하에서 판결의 권위에 당사자가 '납득하리라고 기대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지 않다면' 재판 과정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 판결에 대한 납득의 기대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 근대 이후로 법철학자와 법학자들이 공들여 쌓아 온 법논리와 법개념의 탑인 것입니다.
사실회의주의도 우리가 곧바로 수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사실확정을 한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판장에 가져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간 시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더구나 '과거'가 하나만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인식이나 성향이 다르기에 같은 사건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재판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수집된 증거'들을 모아놓고 '당사자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재구성한 과거의 서사들의 정합성을 판사 앞에서 겨룸'으로써 사건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찾아가는 것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회의주의는 재판의 본질을 오해한 주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재판은 과거의 있는 사실 그 자체를 가지고 판결을 내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재판장에 놓인 증거들에 대한 최선의 시나리오를 재구성해가는 작업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 재판에서 형식과 절차가 지켜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차피 실체적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기에 그보다는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당사자가 재판의 결과에 '납득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권리가 재판 과정에서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 재판의 형식과 절차가 올바르게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검사가 결정적인 증거를 위법하게 수집한 까닭에 그 증거가 증거능력을 잃고 그로 인해 종종 명백한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가 무죄를 선고받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럴 때마다 직관적으로 분노감을 느끼게 되지만, 신중하게 멀리 내다보면 그렇게 지금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놓쳐서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법적 안정성과 헌정 질서에 대한 납득에의 기대가능성을 파괴시키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모든 범죄자를 그런 식으로 놓칠 것이 아니라면 전자의 결과는 한두 범죄자의 방생이지만 후자의 결과는 짧게는 시민에 대한 권리의 침해, 길게는 사회 질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그러하기 때문에 법현실주의는 적어도 우리에게 꼭 알맞은 법철학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법실무와 법학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에 경도되는 것은 경계해야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배우고 활용하고 있는 법학이나 법철학이 통째로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영미법계 전통에서는 법현실주의가 가진 함축이 꽤나 묵직할 수 있고 이것이 법사회학이나 법경제학 등의 출현과 발전에 도움을 준 측면도 있지만, 우리는 대륙법계 국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