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현대의 법철학자 : 켈젠
켈젠(Hans Kelsen, 1881~1973년)은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순수법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등장 이전까지 독일의 법학은 옐리네크의 국법학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옐리네크 또한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식방법이 인식대상을 규정한다는 토대 하에 사실로부터 당위를 분리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국법학을 연구했지만,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 이론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아직까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이 엄정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켈젠은 옐리네크가 주장한 국가의 이중성, 즉 국가가 사회학적 측면과 법적 제도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켈젠이 보기에 법은 오직 당위적 차원에서만 파악되어야 했습니다. 형식적 성격의 선험적 이성구조(apriorische Vernunftstruktur)가 인식대상을 규정한다는 전제 하에, 의식의 궁극적인 논리적 토대를 탐구하기 위해 순수한 선험적 개념 또는 이성적 개념을 밝히려는 신칸트학파의 사조가 도달한 종착점인 '존재와 당위의 완전한 구분'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였습니다.
그런 맥락 하에서 켈젠은 법을 당위로서의 규범으로만 이해하려고 했고, 법에 대한 모든 철학적·정치적·사회적·도덕적 고찰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법학에서 '사실'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를 모두 추방시킨 결과로써 '순수법학'은 19세기부터 출발한 개념법학의 종착점이었습니다. 과거 개념법학이 봉착했던 도그마들을 가장 정교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밀고 나가 사실상 당대 법실증주의를 완성시킨 것이었습니다.
켈젠은 데이비드 흄과 칸트 이래로 내려져오던 아이디어로서, 당위는 결코 존재로부터 도출될 수 없고 오직 또 다른 당위로부터만 이끌어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명제에 의해 해당 법이 지지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가령 지자치단체의 조례를 왜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리로 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켈젠의 법의 단계구조이론(Stufentheorie des Rechts)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규범들의 실효성의 원천은 헌법의 제정행위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헌법은 어째서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요? 헌법 또한 규범이기 때문에 또 다른 규범에 그 효력을 근거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켈젠은 그 규범을 근본규범(Grundnorm)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법질서가 효력을 갖기 위해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가설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다른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당위를 창출할 수 있는 근본규범이란 대체 그 철학적 의미와 정체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파악해야 하는 걸까요? 근본규범의 개념적 추상성과 이에 대한 켈젠 입장의 모호성은 이후에 많은 학자들의 의문을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켈젠의 사유로부터 알 수 있는 유익하고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여하간 법을 오직 당위로서만 파악하게 되면 근본규범과 비슷한 무언가를 전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점에서 암시되듯, 켈젠은 법의 효력이란 상위규범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사실, 즉 오직 합법성에 근거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법은 결국 현실세계를 물리적 혹은 실력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적 기제라는 점을 온전히 포착하지는 못했습니다. 제정된 법이긴 하지만 법현실에서는 그 효력의 강도와 양상이 다양하거나 심지어 사문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켈젠은 법의 효력을 합법성에 근거지우면서도 실효성이 그것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개별 법규범에 현실의 수범자가 그런대로 복종하고 있고 또 강제력으로 실제 집행되고 있어야 법이 효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켈젠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실로부터의 당위의 완전한 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켈젠의 순수법학은 논리적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실제 법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실효성을 법효력의 조건으로 인정하는 순간 메울 수 없는 큰 균열을 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법철학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다른 철학 분야와 달리, 법철학은 결국 현실에서 인간들과 상호작용하는 법이라는 사회제도의 동태와 운용 양상에 대한 설명력을 가져야 하기에 현실을 도외시한 순수이성의 세계로 도피할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켈젠의 순수법학이 법효력에 관한 난점을 배제하면 논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만, 법의 실효성이 법현실에 갖는 중요한 의미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괄호 치고' 생각한 법철학이 과연 무슨 유익한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