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현대의 법철학자 : 스멘트
스멘트(Carl Friedrich Rudolf Smend, 1882~1975년)는 신헤겔주의적 입장에서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내외적 혼란을 바로잡으려 시도한 법철학자입니다. 켈젠을 비롯한 빈학파의 법실증주의가 당시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통합을 강조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해 그에 반대되는 이론을 전개하려 노력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멘트는 헌법을 규범주의적으로만 이해했던 기존의 법실증주의의 흐름과는 달리 헌법을 실질적이고 동태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단순히 헌법에 의해 창설된 규범적 조직체가 아닙니다. 그는 국가란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국가의 사회적 작용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헌법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헌법은 단지 법규범으로서 명문화되었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조직된 생활질서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공감대가 헌법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고 따라서 본질이라는 것이 스멘트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스멘트의 법철학은 '통합(Integration)' 이론으로 정리됩니다. 일정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연대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사회통합을 달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국가가 성립하며, 그 공유된 가치체계의 최소공약수가 헌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본권 또한 스멘트는 종전의 여타 법철학자들과는 다른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기존까지 기본권은 국가 권력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근거이자 각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스멘트에게는 기본권이란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체계의 내용으로서, 그 존재는 국가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가와 국가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납득하게 되는 계기에 더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스멘트의 통합 이론에서 국가와 헌법은 시민의 생활 현실 속 순응과 수용이라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현상에 근거하여, 이것이 지속되는 한에서 존립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즉 사실의 영역에서 사회학적으로만 법을 바라보지도 않고, 당위의 영역에서 규범으로만 법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 중간 지대를 개척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 부분 헤겔주의적인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스멘트는 국민들의 '생활현실 속 순응'을 의식적인 작용으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에 근거합니다.
스멘트는 헤겔의 '정신(Geist)'과 같이 국가는 정신세계에 이미 실체가 드러나 있는 현실이자, 무의식적 생활과정(Lebensvorgang)으로 이해합니다. 이 국가가 자신을 세계에 매시간 드러내고 실현해내가는 과정이 바로 '통합'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헌법은 사회통합의 기능을 강조하면서 시민들을 동일한 가치체계와 생활질서 속에 묶어 놓고, 시민들은 그와 동시에 매 순간 갱신되는 무의식적 신임투표(Plebeszit)를 통해 국가와 헌법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통합 이론의 전체적인 구조가 됩니다.
스멘트의 이러한 법철학은 2차 대전 전후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신생 독립국이던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당시에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온 1세대 유학파 학자들이 스멘트의 영향을 받았던 탓도 있지만, 당시 권위주의적이고 사회통합을 강조하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 또한 스멘트의 법철학이 한국 법학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배경적 맥락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멘트의 법철학은 현대적 관점에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온전히 조화롭게 파악되기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는 결국 사회적 다수와 국가 권력으로부터 기본권을 침해받는 개인을 구제하는 것이 사법 질서의 기능이 되는데, 스멘트와 같이 사회적 통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다수에서 이탈한 소수자' 혹은 '국가 권력의 작용에 저항하는 개인'과 같은 존재는 권리 구제 대상이 아니라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방해 요인으로 치부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헌법과 기본권 등의 본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국민들의 생활현실과 사회적 압력 내지는 관습의 힘을 강조한 것은 고평가 할 만하지만, 그로부터 어떤 규범을 해낼 수는 없다는 근본적 한계를 여전히 극복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할 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혹은 '국가가 시민들의 생활현실에 존재한다'고 해서 '내가 이 법을 따라야 한다'는 명제가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명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면, 위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행정 작용도 정당화하기는 어렵게 될 것입니다.
스멘트는 여러 한계를 지닌 법철학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독일과 한국 법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에 기반한 대법원 판례들이 한동안 쏟아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대에는 그 영향력이 비교적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사회적 현실과 당위를 엄정하게 구분 짓지 않고 그 중간 지대를 개척하려고 시도한 점은 여전히 다양한 법철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본문에서 충분히 다루지는 않았으나 스멘트의 법철학이 파시즘과 연관성이 있다는 누명 혹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계에서 언급되고 다뤄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